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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 저런 아야기

백령도

by 까망잉크 2011. 5. 12.

                                                             

백령도

<오후여담>
동경 124도40분 북위 37도58분,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白翎島). ‘고려사’에 따르면 삼국시대에는 백령도를 ‘곡도(鵠島)’라고 했다. 그런데 고려 태조 때 백령도로 개칭했다고 한다.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양을 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곡도가 백령도로 불리게 된 데는 이설도 있다.

황해도 장산곶의 어느 마을에 과거 준비를 하던 가난한 선비와 그 곳 사또의 딸이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밀애는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인가. 뒤늦게 딸의 열애 사실을 알게 된 사또는 노발대발했다. 결국 그녀와 작별 인사도 못한 채 쫓겨난 선비는 배에 태워져 어느 낯선 섬으로 실려 갔다. 이후 글공부로 마음을 달래던 선비에게 백학 한 마리가 하얀 쪽지를 물어다 주었다. 그녀의 연서였다. 곧이어 선비의 답장을 받은 그녀는 불원천리 험한 뱃길도 마다않고 섬으로 건너왔고…, 둘이는 그 섬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 훗날 사람들은 그 학을 고맙게 여겨 섬을 백학도(白鶴島)라 했는데, 지금은 ‘학 학(鶴)’자 대신 ‘날개 령(翎)’자를 써서 백령도란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지명 유래설이다.

백령도는 이 전설처럼 ‘행복의 섬’이지만, 섬 주위의 바다는 많은 사람을 죽음의 길로 끌어들인 ‘비극의 바다’로 역사에도 악명이 남아 있다. 세종 13년(1431) 3월2일. 대왕은 제주의 국둔마(국영 목장의 말) 가운데서 3세 이상 6세 이하의 암말 500필을 골라 황해도의 초도와 기린도 그리고 백령도 세 섬에 방목하라고 했다. 그로부터 4년 뒤 10월11일, 지장연현사 남혼(南渾)과 대곶만호 서의진(徐義珍) 등이 군사 53명을 거느리고 백령도에 말을 점검하러 들어갔다. 그런데 방목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오던 중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55명의 관리가 한꺼번에 순직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그들의 정신을 높이 기려 통상의 부의(賻儀)보다 10섬씩을 더 지급하도록 배려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로 험난한 백령도 앞바다. 불철주야 그 높은 파도 위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지켜온 천안함의 침몰과 함께 실종된 46명의 수병, 평소 그들이 있었기에 국민 모두는 평화로울 수 있었다…. 35년간 몸에 밴 군인정신으로 그들을 구조하러 나섰다가 안타깝게도 순직한 한주호 준위의 명복을 빈다.

[[황성규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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