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상옥 감독과 함께 한국영화 중흥기 이끌어…납북됐다 탈출하기도
◇ 최씨의 장남인 신정균 감독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오늘 오후 병원에 신장투석을 받으러 가셨다가 임종하셨다"고 밝혔다.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 사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 최은희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사진은 1961년 신상옥 감독 작품 '성춘향'에 여주인으로 출연한 최은희 씨. 연합뉴스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 최은희가 16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 연극 무대를 누비던 그는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을 찍으며 스타로 떠올랐고,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떠올랐다.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그는 1954년 결혼한 뒤 부부가 함께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 연극 무대를 누비던 그는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을 찍으며 스타로 떠올랐고,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60년대 원조 트로이카로 떠올랐다.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신상옥 감독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그는 1954년 결혼한 뒤 부부가 함께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 신상옥 최은희 부부 영화같은 납북 탈출기가 진짜 영화로 [리뷰]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 △ 사진: 신상옥과 최은희는 납북된 뒤 김일성과도 만나며 북한 생활에 적응해갔다. 엣나인필름 제공
○··· 고인은 신 감독과 찍은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1976년까지 130여 편에 출연하며 은막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주최 제1회 국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인은 배우이자,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 감독이기도 했다.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했다.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한 '민며느리'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 고인은 신 감독과 찍은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1976년까지 130여 편에 출연하며 은막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으로 대종상의 전신인 문교부 주최 제1회 국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인은 배우이자,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 감독이기도 했다.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을 연출했다.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한 '민며느리'로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 故 최은희, 남편 신상옥 감독과 납북 후 탈출 '세상 발칵' △ 사진: 1983년 북한 피납 5년에만 상봉한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김정일과 기념촬영하는 모습. 연합뉴스
○··· 1967년에는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신 감독과 이혼한 최씨는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된다. 이후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재회한다.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기록돼있다.신 감독과 최씨는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뒤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에 성공한다. 이후 10년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국 귀국했다.
○··· 1967년에는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신 감독과 이혼한 최씨는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된다. 이후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재회한다.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는 한국인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기록돼있다.신 감독과 최씨는 김정일의 신뢰를 얻은 뒤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미국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에 성공한다. 이후 10년 넘는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영국 귀국했다.
◇ 원로배우 최은희, 마지막 길 떠나다 19일 발인…신상옥 감독 곁에서 영면 △ 사진: 원로배우 최은희 발인이 19일 오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되고 있다. 연합뉴스
○···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했다. 2007년에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담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내기도 했다.2006년 4월 11일 신 감독을 먼저 떠나보낸 뒤 고인은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됐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왔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 2녀가 있다.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12호실 이전 예정)이며, 발인은 19일 오전이다. 연합뉴스![](http://img.yonhapnews.co.kr/photo/yna/YH/2018/04/20/PYH2018042011070001300_P4.jpg)
○···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했다. 2007년에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담은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내기도 했다.2006년 4월 11일 신 감독을 먼저 떠나보낸 뒤 고인은 허리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됐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받아왔다. 유족으로는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 2녀가 있다.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12호실 이전 예정)이며, 발인은 19일 오전이다. 연합뉴스
할아버지와 손자
![](http://img.yonhapnews.co.kr/photo/yna/YH/2018/04/20/PYH2018042011070001300_P4.jpg)
원본글: 한국일보
![](http://img.yonhapnews.co.kr/photo/yna/YH/2018/04/20/PYH2018042016960001300_P4.jpg)
남북 정상간 핫라인 20일 개통
![](http://img.yonhapnews.co.kr/photo/yna/YH/2018/04/20/PYH2018042016960001300_P4.jpg)
2018.4.20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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