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43 주공(周公)이 되라!
(주)하동신문
『주공』의 이름은 단(旦). 주공단(周公旦)으로 불리우기도했던 그는, 고대 중국 주(周)나라 창업자 문왕(文王)의 둘째 아들로 발(發)의 아우였다. 그는 은(殷)나라 말기 아버지를 도와 주나라 창업기초를 닦는데 큰 역할을 한 일등공신이다. 실권을 잡았던 문왕이 큰아들 발을 후계로 삼고 숨지니, 발은 마침내 은나라를 끝장 내고 주나라를 세워 주무왕(周武王)이 되었다.
무왕은 아버지를 문왕으로 추존하고 명실공히 주나라 첫 왕이 되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아우 주공의 힘이 매우 컸다.
무왕이 아직 덜 자란 아들 송(誦)을 아우 주공에게 부탁하고 죽었다. 철없는 어린 송이 왕위에 오르니 곧 주나라 2대왕 성왕(成王)이다.
주공은 곧 섭정(攝政)을 시작, 주나라의 기틀을 더욱 다지고 제도를 개선, 나라에 새로운 기풍이 일게하고, 누구도 어린 성왕을 넘보지 못하게 주변을 단단히 다듬었다.
멸망한 은나라 잔족(殘族)들과 그의 아우 관숙(管叔), 채숙(蔡叔) 등이 연합한 대 반란을 말끔히 진압, 조카를 지켰다. 그는 <주례(周禮)>라는 저서를 편찬, 예악(禮樂)과 법도(法度)를 밝혀 주나라 특유의 문물제도를 창시하였다. 이리하여 나라를 공고히 다진 주공은, 섭정 7년 만에 모든 권력을 성왕에게 넘기고 물러났다.
주공은 정치·사상·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나라의 경영과 백성의 도리를 밝혔던 고대 중국의 위대한 정치 사상가로 평가 받아, 후세 학자들은 그를 성인(聖人)으로 존숭(尊崇), 이름이 빛났다.
단종 즉위 이듬해인 1453년 10월 10일 밤. 단종의 숙부 수양은 드디어 일을 저질렀다.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 단종 보위 핵심 인물 좌의정 김종서(金宗瑞)를 직접 집으로 찾아가 격살했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우의정 정분(鄭분), 우찬성 이양(李穰), 직전 이조판서 민신(閔伸), 현직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평안도관찰사 조수량(趙遂良) 등, 단종 보필에 신경을 쓰는 중신들은, 한명회(韓明澮)가 만든 생살부(生殺簿)에 의거, 홍윤성(洪允成) 등의 철퇴에 일망타진 당했다. 이리하여 밤새 세상을 뒤엎고 정권을 틀어쥔 수양은, 영의정에 이조와 병조판서를 겸하고, 내외병마도통사라는 막강한 군사 지휘권까지 거머지니, 요즘 같으면 국무총리에 행정안전부와 국방부의 장관을 겸하고, 국군 합동참모회의 의장 자리까지 차지한 셈이었으니, 나라의 운명은 어느새 수양의 손안에 들고 말았다. 날이 밝자 수양의 편당으로 한 자리씩 꿰찬 백관들이, 수양의 쿠데타를 찬양하는 왕의 교서를 내리도록 단종에게 우격다짐으로 청했다.
단종이 눈물을 머금고 교서를 초안하도록 집현전에 명하니, 낌새를 눈치챈 학사들이 모두 도망쳐 버리고, 재수 없게 유성원(柳誠源)이 붙들려, 수양 무리들이 떠 벌리는 대로, 반란을 왕권을 넘보는 김종서 일당을 몰아 낸 충정으로 미화하고 말미에 이렇게 썼다.
『…나는 아직 성왕(成王)처럼 어린 나이로 난국을 당했으매, 이미 성왕이 주공에게 맡겼던 바와 같이 숙부(叔父)에게 맡기니, 마땅히 주공이 성왕을 보필한 바와 같이 이몸을 보필할지어다!』
교서를 쓴 유성원은 그날밤 집에 돌아가 목을 놓아 우는데, 부인이 까닭을 몰라 안절부절하였다. 그런 뒤 1년 9개월만인 1455년 윤6월 11일, 수양은 마침내 단종의 전위(轉位)를 받아 임금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세종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유성원은 뒤에 단종 복위 모의가 실패하자 칼로 목을 찔러 자결, 사육신에 들었다.
수양이 권력을 잡았을 때, 좌의정은 김종서의 권력 라이벌 정인지(鄭麟趾), 우의정은 수양의 사돈 한학(韓鶴), 왕의 비서실장인 도승지는 수양의 반란을 도운 최항(崔恒), 9경(九卿-3정승 6판서)이 모두 수양의 패거리들이라, 왕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니 단종은 앉은 자리가 지옥 이었다. 마침내 단종이 고심 끝에 자리를 넘겨 주기로하니, 수양은 넝쿨채 굴러온 호박이지만 이를 냉큼 받기가 숙부로서 체면 문제라 표정관리가 매우 중요하였다.
단종이 경회루 아래에 나와서 수양을 불러 전위의 뜻을 전하니, 수양은 엎드려 천부당 만부당하다고 울며 굳이 사양하는 모양새를 갖췄다. 단종의 명을 받은 예방승지 성삼문(成三問)이 옥쇄를 끌어 안고 나오며 울음을 터뜨리니, 수양은 부복하여 울면서도 통곡하는 성삼문을 매섭게 노려 봤다고 역사는 기록했다.
조선의 『주공』처럼 될 뻔했다가 거꾸로 걸어 가버린 수양의 삶이 참으로 안타깝다.
주나라의 지존(至尊)이던 성왕은 기억하질 않지만 사람들은 그를 보필한 주공을 천하의 대인으로 기억한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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