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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44『공있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벼슬은 덕있는 자에게 주어야한다

by 까망잉크 2018. 7. 7.


<조선왕조 뒷 이야기> 44『공있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벼슬은 덕있는 자에게 주어야한다.

(주)하동신문 

『공있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벼슬은 덕있는 자에게 주어야한다』 옛 성현의 말이다. 『벼슬은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마련된 자리가 아니다』 성군 세종대왕이 한 말이다. 『무릇 벼슬하는 자는 소명(召命)의식이 있어야한다.  이익만 조아 자리만 탐내는 벼슬아치는 백성을 괴롭히고 나라를 망가뜨린다』 새겨 들을 이야기다. 크게 공을 세웠다고 우쭐대는 자에게 벼슬을 안기면, 공을 앞세워 직위를 남용, 백성을 못살게 군다. 그런 가장 표본적인 인물이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저승사자 역할을 톡톡히했던 희대의 패륜아 폭상(暴相) 홍윤성(洪允成)이다.홍윤성의 본관은 회인(懷人), 오늘날의 경기도 평택에서 살았다. 그는 문종 즉위년(1450)에 문과에 올랐는데, 완력이 넘쳐 말단 시절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등 대신들을 무자비하게 철퇴로 갈겨 죽인 수양의 하수인으로 큰역할을 했다.이리하여 홍윤성은 급진적으로 벼슬이 올라 노란자리 판서를 여러곳 거쳐 곧 우의정으로 정승반열에 들었다. 그전에 문종 승하 직후 권력의 향방이 안개속처럼 흐리자, 그는 실권자 김종서(金宗瑞)를 찾아가 활을 부질러 보이는 등 힘자랑을 하며 거둬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김종서는 사람 됨됨이를 보고 팽개치니, 그길로 수양을 찾아 갔던 기회주의자요 출세지향주의자였다.홍윤성은 벼슬이 오르자 곧 탐욕에 빠져 나라를 어지렵히기 시작하였다.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때였다. 어릴때 그를 살펴 주었던 숙부가 찾아와 아들 벼슬자리를 부탁했다. 홍윤성은 숙부를 지그시 바라 보더니 “아무데 논 스무마지기를 내 앞으로 해 주면 한번 생각해 보리다”했다. 숙부가 화기 치밀어 “너는 이놈아 그 논 아니라도 재물이 넘치는데, 30년동안 돌봐준 숙부 재산도 뺐으려 하느냐!”며, 조카의 멱살을 잡으려하니, 홍윤성은 말없이 주먹으로 숙부의 가슴을 쳐 죽여 뒤뜰에 묻어 버렸다.  홍윤성은 그의 패악한 속내가 소문으로 퍼질 우려 때문에 숙부의 명줄을 끊어야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 사람을 함부로 죽였지만, 세상에는 그를 탓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벼슬은 자꾸만 올랐다. 그의 집 앞 개울에서 말을 씻기다가 말과 함께 죽음을 당한 사람도 있었고, 말을 탄 채 집앞을 지나는 길손은 신분을 따지질 않고 때려 죽였다. 한 마을 노파의 논배미에 홍윤성이 미나리를 심자 노파가 찾아와 까닭을 물으며 따졌다. 홍윤성은 아무 대꾸 없이 노파를 끌어다 거꾸로 매달고 돌로 머리를 빠개 죽여 길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어느 여름날 나들이 길에 나무 그늘에서 바둑을 두며 쉬는 늙은이들을 봤다. 홍윤성은 괜히 심술이 났다. “네 이놈들! 지금이 어느땐데 한가한 놀음을 하고있느냐?” 하고 호통을 치더니, 두 노인에게 바둑알을 나누어 모두 입으로 삼켜 넘기라했다. 뱃속에 바둑돌을 가득 채운 노인들이 무사할리 없었다. 길을 가다가 지나가는 양가집 규수를  욕심내 무조건 잡아다가 첩으로 삼으려했다. 규수의 부모는 고이 기른 딸이 갑자기 천첩이 됐다며 울부짖었고, 규수는 은장도를 빼들고 정실(正室)로 삼지 않으면 자결하겠다고 덤비니, 홍윤성은 왕으로부터 정실을 두명 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전무 후무하게 정실 둘을 거느린 어거지 사내가 됐다. 『동지(同志)와 동업자(同業者)는 구분해야한다. 동지는 소명(召命)에 뜻을 같이하고 동업자는 이익만 노리는 장사꾼일 뿐이다』 세조와 홍윤성은 철저한 동업자 관계였다. 세조가 홍윤성의 인품을 살펴 공(功)에 걸맞는 상(賞)을 주고, 벼슬은 덕(德)을 갖췄는지를 살펴 안겨야 했었는데, 그렇지가 못했으니 결국 세조는 왕권을 노렸고 홍윤성은 벼슬을 탐했던 동업자 관계로 평가하지 않을 수없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조의 가장 큰 실수는 인두수행(人頭獸行), 즉 사람머리를 하고 짐승처럼 행동하는 패덕(悖德)한 모리배(謀利輩)에게 높은 벼슬을 안긴 일이었다.못을 병이 들어 제어에 시달리던 세조가,  뒤늦게 조카의 주먹에 남편을 잃은 홍윤성 숙모의 하소연을 듣고 세조는 비로소 깨달아 홍윤성을 죽이려했으나, 역시 공신을 죽여서는 다른 동업자들의 만류로 살려 주는 대신, 죄없는 그의 종들 열명을 골라 보신탕 집 개잡들이 무더기로 죽이니, 이래 저래 홍윤성 때문에 목숨을 앗긴 불쌍한 백성들 머리수만 늘었다. 홍윤성은 성종6년(1475) 9월 죽었다, 더럽게 누린 나이 51살, 억지로 삼은 정실 둘에서는 자식이 없고, 첩의 소생에서 낳은 홍윤성의 손녀가 커서 군수 고헌(高헌)의 아내가 되었다.     
                        
정 연 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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