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48
(주)하동신문
4월의 정치판을 달굴 정가에 “살생부(殺生簿)가 떠돈다”는 말이있어, 문득 그런 장부와 관련이 깊은 상당(上黨)부원군 한명회(韓明澮)가 뇌리를 스친다.
500년 조선사에 가장「빛나는?」으뜸 인물은, 수양대군 왕위 찬탈에 대공을 세운 한명회다. 그는 단종 원년(1453) 수양의 쿠데타를 합리화한 계유정난 뒷풀이 정난(靖難)공신, 수양의 등극 축하 파티와 함께 나눠 가진 좌익(佐翼)공신, 예종 즉위년에 벌어진「남이(南怡)의 옥사」뒷처리로 받은 익대(翊戴)공신, 성종 즉위년(1470) 왕실을 잘 보좌했다는 공을 내세워 챙긴 좌리(佐理)공신, 등급 불구하고 한번 공신에 들기도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웠는데, 네 번에 걸쳐 그것도 일등만 차지했으니 한명회의 입지는 천하를 흔들 지경이었다.
『부원군(府院君)』은 조선시대 임금의 장인이나 우뚝한 공신을 받들고자 마련한 호칭이다. 한명회는 세조때 이미「상당 부원군」에 봉해져 임금 다음으로 조야의 예우를 받았다.
한명회는 아들 보(堡)와 딸 넷을 뒀는데, 딸들이 그의 신분을 살찌우는 밀알이되었다.
맏딸은 세종의 사위 윤사로(尹師路)의 며느리, 둘째는 정치적 동지 신숙주(申叔舟)의 맏며느리, 셋째가 예종이 세자시절 맞이했던 장순왕후, 넷째가 성종의 첫왕비 공혜왕후였으니, 한명회는 두 임금의 장인으로 2대 국구(國舅)가 되는 광영을 차지, 세조·예종·성종 3대에 걸쳐 부원군으로 득세하였다. 그러나 정작 왕비들은 불행했다. 예종비 한씨는 예종이 등극하기전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욕 끝에 17세 나이로 죽었고, 인성대군도 뒤따라 숨져 한명회의 속을 갉았다. 뒤에 성종이 자신의 처형이던 한씨를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정치권에 두려울게 없었던 한명회는 세조비 정희왕후와 세조의 큰며느리 소혜왕후(인수대비)에게 접근, 막내딸을 요절한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에게 시집 보내는데 성공했다.
예종과 자을산군은 사가(私家)로치면 숙질간인데 한명회를 같이 장인으로 삼은 동서간이 된 셈이었다.
예종이 20세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세조의 맏 며느리 소혜왕후가 발빠르게 사돈 한명회와 손잡고 시어머니 정희왕후를 설득, 차남 자을산군을 보위에 앉히는 꿈을 이루니, 이가 곧 성종이었다.
장남을 제끼고 둘째를 세우는데는, 사위를 왕으로 삼고자 눈에 핏발을 세운 한명회 힘이 결정적이었다.「장손자 옹립」을 주장했던 정희왕후도 한명회의 힘에 눌려, “왕실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뜻을 굽히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명회의 막내 딸은 공혜왕후가 되었는데, 그도 역시 19세 어린 나이로 자식도 없이 친정 아버지에게 절통한 마음만 안겨주고 저승으로 떠나고 말았다.
한명회는 영의정 한상경(韓尙敬)의 종손자로, 개국 초 명나라로부터『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아온 학자 한상질(韓尙質)의 친손자이며, 중추원부사 민대생(閔大生)의 사위였고, 외조부가 예문관대제학 이적(李적)이라 출생 텃밭이 비길데 없이 기름졌다. 그러나 학문이 모자라 과거에 번번히 미끌어졌고, 38세때 근본의 후광을 업고 특채로 종9품 경덕궁직이라는 최말단 자리를 얻어 걸쳤다. 개성땅 고려 왕씨들 옛 궁궐을 지키는 직위였는데, 그는 궁궐 기왓장을 벗겨 팔아 주색잡기를 즐기기도했던 몹시 능청스런 공직자였다. 그러다가 친구 권람의 소개로 세조의 책사가 되고부터 욱일승천? 궁직이 발령 13년만에, 52세 나이로 백관의 우두머리 영의정에 오르고 4대 공신, 3대부원군, 2대에 걸친 왕의 국구(國舅)라는 어마 어마한 직위를 누렸다. 권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재물까지 쌓으니, 그야말로 명(名)·권(權)·부(富) 세가지를 함께 누린 출세 덩어리였다. 그러나 그의 영화(榮華)의 상징 한강변의 「압구정」을 쳐다보는 세상의 눈길은 싸늘했다. 선비 최경지(崔敬止)는 읊었다.
『왕이 하루 세 번씩 불러 총애가 높더니
정자는 있으나 와서 노는 주인은 없네.
가슴속이 발랐더라면 비록 벼슬 높았어도
갈매기와 친 할수있었으련만』
또 부제학 이윤종(李尹宗)은 압구정 앞에서 중얼거렸다.
『정자가 있다하나 돌아와 쉬질 않으니
그 누가 정자 주인을
「갓쓴 원숭이」라 아니 하리오』
늙어서까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한명회를 조롱하는 말들이었다. 얼마뒤 유자광이 그의 치부를 까발겨 목을 비트니 더는 버티질 못했다.
권부에서 밀려나 통분 끝에 도끼로 정강이를 찍기도하며 울분을 삭이다가 염라대왕의 부름을 받으니, 어지럽게 누린해 73년, 촌수로 따져 엄연히 그의 외손자 뻘인 연산군은, 그의 무덤을 파헤쳐 해골에 칼질을했다. 당대의 영화만 쫓던 그의 평판은 지극히 초라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주)하동신문
4월의 정치판을 달굴 정가에 “살생부(殺生簿)가 떠돈다”는 말이있어, 문득 그런 장부와 관련이 깊은 상당(上黨)부원군 한명회(韓明澮)가 뇌리를 스친다.
500년 조선사에 가장「빛나는?」으뜸 인물은, 수양대군 왕위 찬탈에 대공을 세운 한명회다. 그는 단종 원년(1453) 수양의 쿠데타를 합리화한 계유정난 뒷풀이 정난(靖難)공신, 수양의 등극 축하 파티와 함께 나눠 가진 좌익(佐翼)공신, 예종 즉위년에 벌어진「남이(南怡)의 옥사」뒷처리로 받은 익대(翊戴)공신, 성종 즉위년(1470) 왕실을 잘 보좌했다는 공을 내세워 챙긴 좌리(佐理)공신, 등급 불구하고 한번 공신에 들기도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려웠는데, 네 번에 걸쳐 그것도 일등만 차지했으니 한명회의 입지는 천하를 흔들 지경이었다.
『부원군(府院君)』은 조선시대 임금의 장인이나 우뚝한 공신을 받들고자 마련한 호칭이다. 한명회는 세조때 이미「상당 부원군」에 봉해져 임금 다음으로 조야의 예우를 받았다.
한명회는 아들 보(堡)와 딸 넷을 뒀는데, 딸들이 그의 신분을 살찌우는 밀알이되었다.
맏딸은 세종의 사위 윤사로(尹師路)의 며느리, 둘째는 정치적 동지 신숙주(申叔舟)의 맏며느리, 셋째가 예종이 세자시절 맞이했던 장순왕후, 넷째가 성종의 첫왕비 공혜왕후였으니, 한명회는 두 임금의 장인으로 2대 국구(國舅)가 되는 광영을 차지, 세조·예종·성종 3대에 걸쳐 부원군으로 득세하였다. 그러나 정작 왕비들은 불행했다. 예종비 한씨는 예종이 등극하기전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산욕 끝에 17세 나이로 죽었고, 인성대군도 뒤따라 숨져 한명회의 속을 갉았다. 뒤에 성종이 자신의 처형이던 한씨를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정치권에 두려울게 없었던 한명회는 세조비 정희왕후와 세조의 큰며느리 소혜왕후(인수대비)에게 접근, 막내딸을 요절한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에게 시집 보내는데 성공했다.
예종과 자을산군은 사가(私家)로치면 숙질간인데 한명회를 같이 장인으로 삼은 동서간이 된 셈이었다.
예종이 20세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세조의 맏 며느리 소혜왕후가 발빠르게 사돈 한명회와 손잡고 시어머니 정희왕후를 설득, 차남 자을산군을 보위에 앉히는 꿈을 이루니, 이가 곧 성종이었다.
장남을 제끼고 둘째를 세우는데는, 사위를 왕으로 삼고자 눈에 핏발을 세운 한명회 힘이 결정적이었다.「장손자 옹립」을 주장했던 정희왕후도 한명회의 힘에 눌려, “왕실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뜻을 굽히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명회의 막내 딸은 공혜왕후가 되었는데, 그도 역시 19세 어린 나이로 자식도 없이 친정 아버지에게 절통한 마음만 안겨주고 저승으로 떠나고 말았다.
한명회는 영의정 한상경(韓尙敬)의 종손자로, 개국 초 명나라로부터『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아온 학자 한상질(韓尙質)의 친손자이며, 중추원부사 민대생(閔大生)의 사위였고, 외조부가 예문관대제학 이적(李적)이라 출생 텃밭이 비길데 없이 기름졌다. 그러나 학문이 모자라 과거에 번번히 미끌어졌고, 38세때 근본의 후광을 업고 특채로 종9품 경덕궁직이라는 최말단 자리를 얻어 걸쳤다. 개성땅 고려 왕씨들 옛 궁궐을 지키는 직위였는데, 그는 궁궐 기왓장을 벗겨 팔아 주색잡기를 즐기기도했던 몹시 능청스런 공직자였다. 그러다가 친구 권람의 소개로 세조의 책사가 되고부터 욱일승천? 궁직이 발령 13년만에, 52세 나이로 백관의 우두머리 영의정에 오르고 4대 공신, 3대부원군, 2대에 걸친 왕의 국구(國舅)라는 어마 어마한 직위를 누렸다. 권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재물까지 쌓으니, 그야말로 명(名)·권(權)·부(富) 세가지를 함께 누린 출세 덩어리였다. 그러나 그의 영화(榮華)의 상징 한강변의 「압구정」을 쳐다보는 세상의 눈길은 싸늘했다. 선비 최경지(崔敬止)는 읊었다.
『왕이 하루 세 번씩 불러 총애가 높더니
정자는 있으나 와서 노는 주인은 없네.
가슴속이 발랐더라면 비록 벼슬 높았어도
갈매기와 친 할수있었으련만』
또 부제학 이윤종(李尹宗)은 압구정 앞에서 중얼거렸다.
『정자가 있다하나 돌아와 쉬질 않으니
그 누가 정자 주인을
「갓쓴 원숭이」라 아니 하리오』
늙어서까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한명회를 조롱하는 말들이었다. 얼마뒤 유자광이 그의 치부를 까발겨 목을 비트니 더는 버티질 못했다.
권부에서 밀려나 통분 끝에 도끼로 정강이를 찍기도하며 울분을 삭이다가 염라대왕의 부름을 받으니, 어지럽게 누린해 73년, 촌수로 따져 엄연히 그의 외손자 뻘인 연산군은, 그의 무덤을 파헤쳐 해골에 칼질을했다. 당대의 영화만 쫓던 그의 평판은 지극히 초라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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