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49
(주)하동신문
성종 즉위 초, 임금의 직계 종친은 5대까지 조정 내외 문무관직을 받지 못하게 규정한 법규가 만들어져 종친들을 안타깝게했다. 발단은 「구성군(龜城君) 역모 사건」이었다.
사안의 중심 인물 구성군 이준(李浚)은 세종23년(1441) 세종의 4남 임영(臨瀛)대군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좌의정 남지(南智)의 딸, 임영대군은 수양의 집권을 도와 세조의 힘이 됐던 아우. 이준은 어릴때부터 총기가 넘쳤고, 풍기는 문무 겸전의 기백으로 세조의 눈에 들었다.
세조12년(1466) 이준이 무과에 장원급제하니, 왕은 친조카인 그를 장차 든든한 왕실의 버팀목으로 삼고자 다짐했다.
이듬해 5월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터지자, 세조는 이준을 함경·강원·평안·황해 4도 병마도통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위에 앉혀 그를 반란 진압 총책으로 삼았다. 무과급제 1년만에 27세 젊은 나이로 군부 최고 실력자가 된 이준은, 선봉장으로 나간 호조판서 조석문(曺錫文)을 비롯,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허종(許悰), 남이(南怡) 등 쟁쟁한 장수들을 거느린 최고 사령관이었다. 그런데 이준이 출정 10일이 지나도록 겨우 철원에 이르니, 세조가 진군이 더디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창졸간에 어린애에게 큰 일을 맡긴게 내 실수였다!”하며, 출격을 엄하게 재촉했다.
그러나 이준은 “철원은 길이 험하여 전진이 더디다!” 하고, 책임을 길을 넓게 손질하지 않은 강원도 관찰사에게 돌려, 죄없는 지방 장관을 잡아다 목을 쳐버렸다.
그런데 이런 이준의 느린 행보는 세조의 밀지 때문이었다. 텅비어버린 도성에 혹시 무슨 변고가 있을까 싶어 이준을 멀리 반역 현지까지 보내려하지 않았던 세조의 계산된 술계(術計). 예상대로 「이시애의 난」은 이준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진압되었다.
세조는 반란 평정의 공을 이준에게 돌려 곧 그를 병조판서에 앉혀 나라의 병권을 맡기더니, 이듬해는 백관의 우두머리인 영의정에 특임, 국정을 총괄하게했다.
이리하여 구성군 이준은 무과급제 2년만에「일품종실(一品宗室)이 되니,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 세조는 자신은 물론 세자까지 병약하니, 출중한 이준에게 몸을 기대고 싶어 파격적으로 친조카를 키웠던 것이다.
이준이 영의정에 오른 두달만인 9월 몹쓸병과 싸우던 세조가 눈을 감고, 역시 「건강」과는 거리가 먼 예종이 등극했다. 그해 12월에 아버지 임영대군이 세상을 뜨니, 영의정 이준은 치상(治喪)을 위해 관직을 털어야했다. 기어이 예종이 한해 남짓 보위를 지키다가 숨지니, 어거지로 빼앗은 지저분한 왕권을 두고 사람들은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고 했다.
세조비 정희왕후와 세조의 큰며느리 소혜왕후(인수대비), 왕실의 겹사돈 한명회(韓明澮)는 머리를 맞대, 네 살 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재껴버리고, 세자 몸으로 요절했던 도원군의 차남이며 한명회의 사위인 열세살 자을산군(者乙山君)을 왕으로 세우니 이가 곧 성종이었다.
가늠할 수없는게 세상일이라 상중(喪中)의 이준이 자다가 날벼락 맞는 사달이 벌어졌다. 직장(直長) 최세호(崔世豪)와 권맹희(權孟禧)라는 두 천치(天痴)가, 「구성군 추대」라는 망상을 품고 세조의 동서 좌찬성 한계미(韓繼美)를 찾아갔다.
“찬성대감! 임금감은 구성군 밖에 없오! 명망이 높으니 추대합시다!”
“그게 될 말인가? 비록 어리나마 임금이 계신데!”
“우리는 구성군을 모시고 정인지(鄭麟趾)·신숙주 등을 없애고 싶소!”
화들짝 놀란 한계미는 가만 있다가는 역적으로 불벼락을 맞기 마련이라 촌각을 다투어 정원에 고변, 일이 터지니, 안타깝게도 상중의 구성군이 반역의 중심에 서고 말았다.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질 일이었다.
대신 정인지가 사돈인 세조비 정희왕후에게 달려가, 구성군 이준을 죽여 화근을 뽑아 버리자 했다. 그러나 기가 막힌 정희왕후는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반대하였다.
“구성군은 선왕이 총애하던 조카요! 구성군은 절대로 역심을 품을 사람이 아니오! 쓸데 없는 자들의 모해요! 다시는 그런 소릴 마오!”
대신들과 정희왕후는 이준을 「죽여야 된다」「안된다」하며 치열하게 실갱이를 하는데, 신숙주가 묘안을 냈다. 구성군 이준을 몸을 피해 살도록 멀리 보내 버리자 한 것이다.
이리하여 이준은 오늘날의 경상북도 영덕땅에 버려지는 몸이 되고 말았다. 조정은 이런 일의 재발을 막기위해 「직계종실 출사금지」규정을 만들어, 가까운 종친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벼슬을 못하게했다. 벽촌에서 속끓이며 10년을 허우적 거린 이준은, 성종10년(1479) 10월, 한을 품고 죽고 말았다.
어지럽게 누린 인생 39년, 이른바 전복위화(轉福爲禍), 복이 화를 불렀다고나할까. 그토록 화려했던 구성군의 생애는 엉뚱하게 끝났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주)하동신문
성종 즉위 초, 임금의 직계 종친은 5대까지 조정 내외 문무관직을 받지 못하게 규정한 법규가 만들어져 종친들을 안타깝게했다. 발단은 「구성군(龜城君) 역모 사건」이었다.
사안의 중심 인물 구성군 이준(李浚)은 세종23년(1441) 세종의 4남 임영(臨瀛)대군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좌의정 남지(南智)의 딸, 임영대군은 수양의 집권을 도와 세조의 힘이 됐던 아우. 이준은 어릴때부터 총기가 넘쳤고, 풍기는 문무 겸전의 기백으로 세조의 눈에 들었다.
세조12년(1466) 이준이 무과에 장원급제하니, 왕은 친조카인 그를 장차 든든한 왕실의 버팀목으로 삼고자 다짐했다.
이듬해 5월 함경도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터지자, 세조는 이준을 함경·강원·평안·황해 4도 병마도통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위에 앉혀 그를 반란 진압 총책으로 삼았다. 무과급제 1년만에 27세 젊은 나이로 군부 최고 실력자가 된 이준은, 선봉장으로 나간 호조판서 조석문(曺錫文)을 비롯, 강순(康純), 어유소(魚有沼), 허종(許悰), 남이(南怡) 등 쟁쟁한 장수들을 거느린 최고 사령관이었다. 그런데 이준이 출정 10일이 지나도록 겨우 철원에 이르니, 세조가 진군이 더디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창졸간에 어린애에게 큰 일을 맡긴게 내 실수였다!”하며, 출격을 엄하게 재촉했다.
그러나 이준은 “철원은 길이 험하여 전진이 더디다!” 하고, 책임을 길을 넓게 손질하지 않은 강원도 관찰사에게 돌려, 죄없는 지방 장관을 잡아다 목을 쳐버렸다.
그런데 이런 이준의 느린 행보는 세조의 밀지 때문이었다. 텅비어버린 도성에 혹시 무슨 변고가 있을까 싶어 이준을 멀리 반역 현지까지 보내려하지 않았던 세조의 계산된 술계(術計). 예상대로 「이시애의 난」은 이준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진압되었다.
세조는 반란 평정의 공을 이준에게 돌려 곧 그를 병조판서에 앉혀 나라의 병권을 맡기더니, 이듬해는 백관의 우두머리인 영의정에 특임, 국정을 총괄하게했다.
이리하여 구성군 이준은 무과급제 2년만에「일품종실(一品宗室)이 되니,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 세조는 자신은 물론 세자까지 병약하니, 출중한 이준에게 몸을 기대고 싶어 파격적으로 친조카를 키웠던 것이다.
이준이 영의정에 오른 두달만인 9월 몹쓸병과 싸우던 세조가 눈을 감고, 역시 「건강」과는 거리가 먼 예종이 등극했다. 그해 12월에 아버지 임영대군이 세상을 뜨니, 영의정 이준은 치상(治喪)을 위해 관직을 털어야했다. 기어이 예종이 한해 남짓 보위를 지키다가 숨지니, 어거지로 빼앗은 지저분한 왕권을 두고 사람들은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고 했다.
세조비 정희왕후와 세조의 큰며느리 소혜왕후(인수대비), 왕실의 겹사돈 한명회(韓明澮)는 머리를 맞대, 네 살 된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재껴버리고, 세자 몸으로 요절했던 도원군의 차남이며 한명회의 사위인 열세살 자을산군(者乙山君)을 왕으로 세우니 이가 곧 성종이었다.
가늠할 수없는게 세상일이라 상중(喪中)의 이준이 자다가 날벼락 맞는 사달이 벌어졌다. 직장(直長) 최세호(崔世豪)와 권맹희(權孟禧)라는 두 천치(天痴)가, 「구성군 추대」라는 망상을 품고 세조의 동서 좌찬성 한계미(韓繼美)를 찾아갔다.
“찬성대감! 임금감은 구성군 밖에 없오! 명망이 높으니 추대합시다!”
“그게 될 말인가? 비록 어리나마 임금이 계신데!”
“우리는 구성군을 모시고 정인지(鄭麟趾)·신숙주 등을 없애고 싶소!”
화들짝 놀란 한계미는 가만 있다가는 역적으로 불벼락을 맞기 마련이라 촌각을 다투어 정원에 고변, 일이 터지니, 안타깝게도 상중의 구성군이 반역의 중심에 서고 말았다.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쪼개질 일이었다.
대신 정인지가 사돈인 세조비 정희왕후에게 달려가, 구성군 이준을 죽여 화근을 뽑아 버리자 했다. 그러나 기가 막힌 정희왕후는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반대하였다.
“구성군은 선왕이 총애하던 조카요! 구성군은 절대로 역심을 품을 사람이 아니오! 쓸데 없는 자들의 모해요! 다시는 그런 소릴 마오!”
대신들과 정희왕후는 이준을 「죽여야 된다」「안된다」하며 치열하게 실갱이를 하는데, 신숙주가 묘안을 냈다. 구성군 이준을 몸을 피해 살도록 멀리 보내 버리자 한 것이다.
이리하여 이준은 오늘날의 경상북도 영덕땅에 버려지는 몸이 되고 말았다. 조정은 이런 일의 재발을 막기위해 「직계종실 출사금지」규정을 만들어, 가까운 종친은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벼슬을 못하게했다. 벽촌에서 속끓이며 10년을 허우적 거린 이준은, 성종10년(1479) 10월, 한을 품고 죽고 말았다.
어지럽게 누린 인생 39년, 이른바 전복위화(轉福爲禍), 복이 화를 불렀다고나할까. 그토록 화려했던 구성군의 생애는 엉뚱하게 끝났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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