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50
세조의 만수무강을 빌다!
聖王中興五百年
성상께선 오백년을 다시 일으킨 임금
熙熙功業政超然
빛나는 그 업적 뛰어 났어라
鼎新日月唐虞盛
새로워진 달 요순때 처럼 창성하고
挽古乾坤禮樂鮮
옛법을 찾은이 세상 예악이 새로워라.
庶政己修崇竺法
온갖 정사 다스리고 불교도 받드시니
千官初賀捧堯天
백관들이 비로소 태평성대 찬양하네
覺皇有鑑如回瞬
부처가 돌아 보심은 눈 깜짝할 사이지만
應壽吾王萬有年
우리 대왕 수명은 억만년을 누리소서
(허경진-매월당 김시습 시선)
세조의 집권이 싫어 세상에의 미련을 버리고 불기인(不羈人)으로 떠 돌던 김시습(金時習)이, 세조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시를 남겼으니, 참으로 그의 기인(奇人)다운 풍모를 보여준 아이러니다.
김시습의 본관은 강능, 안주목사 김윤주(金允柱)의 증손이며, 오위부장 김겸간(金謙侃)의 손자, 아버지는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에 올랐으니, 그는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은 환문(宦門)출신이었다.
세종17년(1435)에 태어난 김시습은 탯줄 자른지 여덟달만에 글을 알았을 만큼 특이한 머리의 아이였고, 세살 때 유모의 보리방아 찧는 모습을 보고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조야회통(朝野會通)>에 전한다했다.
김시습의 「3세 작시(作詩)」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그를 김신동(金神童)이라 했다. 세종이 김시습을 찾으니 그는 내관의 품에 안겨 편전에 들어와 왕과 마주했다. 세종이 시험 삼아 시를 짓게했더니 김시습은 짬을 두질 않고 주저 없이 읊었다. 세종이 놀라 찬탄하고 옆에 자리한 세자(문종)와 제대로 앉질 못하는 어린 세손(단종)을 두고,
“저 둘이 장차 너의 임금이 될지니, 잘 기억해 두라!”했다. 세종이 상으로 명주 50필을 김시습 앞에 놓고 가져가라했다. 아이의 지혜를 엿보기 위해서 였다. 김시습은 명주를 모두 이어 한 끝을 어깨에 걸쳐 끌고 대궐문을 나가니, 보는 사람들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때 그의 나이 다섯 살. 사람들은 그를 김오세(金五歲)라 부르기 시작했다.
세종32년(1450) 김시습은 17세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나가 당당히 급제, 생원이 되었는데, 단종1년(1453) 대과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운이 딸치 않은 것이다. 이듬해 수양대군이 왕위를 앗아 버렸다는 소문을 들은 김시습은, 사흘 동안 목놓아 울다가 서책을 모조리 불사르고, 걸승(乞僧)으로 방랑하며 스스로 호를 「오세(五歲)」라 했다. 다섯 살때 세종을 친견했음을 기억하고자함이었다. 설악산에 들어가 작은 거처를 정해 「오세암(五歲庵)」이라했는데 그때 나이 스물넷이었다.
김시습은 세조에게 빌붙은 벼슬아치들을 몹시 미워했다. 어느날 거리에서 잘 나가던 마상(馬上)의 이조판서 서거정(徐巨正)을 만났다. 서거정 역시 6세때 신동 소릴 들은 문학의 천재, 김시습 보다 15년 연장으로 김시습이 존경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시습은 대뜸
“야, 강중(剛中-서거정 자)이 오랜만이구나! 요샌 재미가 어떠냐?
거침없는 하대였으나 서거정은 큰 인물 답게 흔들리지 않았다.
“열경(悅卿-김시습 자)이 한참 적조했네 그려! 그새 무고하신가?”
김시습이 폭력 정권에서 한세상 누리는 서거정을 자꾸만 빈정거리자, 서거정은 그의 천재적 문학성을 들어내 김시습의 기분을 가라 앉혔다.
“참새는 기왓골에다 둥지를 틀고, 고니는 갈대밭에서 풀씨를 찾으니 그 생태인즉 자연에서 비롯 됨이 아니겠오?”
서거정은 자신을 참새, 김시습을 고니에 비유하여 치켜 세워 주었다. 서거정이 이렇게 나오니 김시습은 더 찍자를 부릴순 없었다.
“하기야 기와집에서는 상아(象牙) 조각으로 이를 쑤시고, 갈밭에서는 바람결로 머리를 빗는 것도 다 제멋이리다!” (이문구-매월당 김시습)
어느날 서울 거리에서 남여를 탄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요란한 행차길을 만났다. 김시습은 서슴치 않고 손까락질로 겨누며 큰 소리로
“야 이놈아! 늙은 놈이 어지간이 해먹고 그만 나오너라!”
그때 정창손의 나이 75세, 김시습보다 서른 넷 연장이었다. 정창손은 못들은 체 지나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김시습은 스물아홉살 때 효령대군을 만나 내불당에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을 돕다가, 세조의 숭불사업에 매료되고 말았다. 세조의 명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식에 참석, 그때 세조의 공업을 기리는 시를 지었던 것이다. 생육신 치고는 조금 다른 면모의 김시습이었다. 성종24년(1493) 3월 홍산(鴻山-충청남도 부여) 만수산(萬壽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마치니 생애 쉰아홉이었다.
정연가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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