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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91

by 까망잉크 2018. 10. 27.

<조선왕조 뒷 이야기> 91

 
중종7년(1512) 문종의 유일한 혈손 해주정씨 가문의 해평부원군 정미수(鄭眉壽)가 57세 나이로 숨지니, 중종은 그에게 소평공(昭平公)으로 시호를 내려 두텁게 대접하였다. 
단종 이후 문종의 후예로는 오직 외손자 정미수(鄭眉壽)가 있을 뿐이었다. 정미수의 어머니는 문종의 적(嫡)외딸 경혜(敬惠)공주 아들인데, 아버지는 영양위(寧陽衛) 정종(鄭悰).
문종의 여자로는 현덕왕후 권씨와 후궁으로 자식이 없던 귀인 홍씨, 수칙(守則) 양씨까지 셋이었다.「수칙」은 내명부의 종6품직으로, 세자시절의 문종이 세자궁에 딸린 궁여 양씨와 정을 통해 딸을 하나 얻으니, 양씨에게「수칙」직위를 내렸고 그 딸을 경숙옹주라했다. 옹주는 강자순(姜子順)에게 시집 갔으나 슬하를 두지 못했다.
문종의 외아들 단종은 정순왕후 송씨가 유일한 여자였는데, 단종을 만난 이듬해 그만 탈을 만나 자식을 하나도 두질 못했다. 그러니 문종이 남긴 핏줄이라고는 오직 외손자 정미수 뿐 일수 밖에.
단종 초기 형조판서에 오른 영양위 정종은, 처남 단종이 수난을 당하자, 전라도 광주까지 쫓겨가 귀양을 살아야했고, 정미수는 그 무렵 귀양지에서 태어 난 것으로 알려 진다. 
정미수가 일곱 살 되던 해 세조6년(1461) 아버지 정종이 승려 성탄(性坦) 등과 반역을 도모했다는 혐의를 받아 능지처참 당하고, 어머니 경혜공주는 전라도 순천 관비로 보내지고 말았다. 
어린 정미수가 아버지 얼굴이라도 한번 볼려고 달려 갔으나 이미 정종의 시신은 발기 발기 찢겨져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었고 정미수도 죽을 각오를 해야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조가 정미수를 왕실로 불러 거두는데, 그는 형 문종이 남긴 유일한 혈점이라며 「미수」라는 이름도 그가 친히 지었고, 특히 세조비 정희왕후는 정미수를 더욱 불쌍히 여겨 보살폈다. 
철학자 스티븐 레바인이 말했다. 『당신의「두려움」이 어떤 사람의 고통에 닿으면 그것은「동정」으로 변하고, 당신의「사랑」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가 닿으면 그것은 「자비」가 된다』
욕심을 다 채운 세조와 정희왕후에게 남은 것은, 저승에서 만날 악연의 원혼들에 대한「두려움」이 아니었을까.     
단종이 저승 식구가 돼 버리자 동행하지 못한 송씨는 관비가 되어 욕된 삶을 살아야 했는데, 신숙주(申叔舟)가 송씨를 자기집 노비로 달라고 세조에게 청했다. 
그러나 세조는「안된다」며 송씨로 하여금 궁중에 들어와 정미수를 기르라 명했다. 
한때 신숙주를 미워한 정구(鄭逑)가 「세조가 나라를 얻으매 신숙주가 공신으로 단종비를 받아서 여종으로 삼았다」고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너무 앞지른 말이었다.
이리하여 정미수는 세조의 총애로 벼슬길에 나가 성종때 형조정랑에 이르렀는데, 세조가 눈을 감으니 아첨배들이 정미수를 죽이자했다. 그들은 정미수를「죄인의 자손」이라며 핏대를 세웠다. 
이때 섭정을 하던 세조비 정희왕후가 방바닥을 쳤다. 
“죄없는 종친을 왜 죽이려는가! 또 다시 거론하는 자는 내가 그자를 먼저 죽이리라!”라고 눈알을 부라리니, 피도 눈물도 없는 왕실 아부꾼들은 더는 독사 같은 혀를 날름거리지 못했다.  
이후 정미수의 관로는 평탄하여 연산군때 충청도관찰사·도승지·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고, 연산군말년에 의정부참찬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했다. 중종 반정때는 중종을 잠저에서 대궐로 안내하는 일익을 담당, 정국공신3등에 책록되었다. 
보국숭록대부에 올라 해평부원군에 봉해진 정미수는 사가로 외숙모가 되는 단종비 송씨 부인에게 은혜를 갚고자 시양자(侍養子)가 되어 송씨 부인을 극진히 섬기며 노산군(단종)의 제사까지 받들었다. 
송부인은 평생을 서인 신분으로 살다가 중종16년(1521) 6월 82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는데, 정미수 보다 더 오래 살았다. 
송씨는 정미수가 후사를 두지 못한 채 떠나자, 그가 간직했던 집과 재물, 노비를 정미수 아내에게 물려 주고자 조정에 청을 넣었다. 이에 예조참판 김정국(金正國)이 중종에게 상주했다. 
“정미수가 이미 죽었고 후사가 없으니 미수의 아내 마져 죽는 다면 노산군(단종)의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으니 심히 참담하옵니다. 입후(立後) 할 일을 의논해야 마땅 할 줄 아옵니다”
그러나 중종은 「송씨에게 맡기라」며 챙기지 않으니, 단종 내외의 위패는 정씨 가문에서 돌봤다. 먼 훗날 숙종24년(1698) 비로소 단종은 복위 되고 송씨는 세상을 뜬지 177년만에 정순왕후로 추봉 되고 신주가 정씨가문에서 나왔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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