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92
옛적에 고관대작으로 끗발을 부리다가, 죽은 뒤에 죄가 들어나거나, 또는 지은 죄가 없는데도 연산군 같은 못된 임금을 만나, 운 나쁘게 죄를 둘러 쓴 나머지, 무덤이 파헤쳐져 해골이 난자 당하는 이른바 부관참시(剖棺斬屍)라는 웃기는 형벌이 있었다.
믿을 이야긴지는 모르겠으나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부관참시를 백번도 더 당해야 할, 흉폭하기 이를데 없었던 자가 해괴한 꾀를 내 욕 된 해골이 온전하다며 입맛을 다시는 경우가 있다.
조선조 최고의 악흉(惡兇) 유자광(柳子光)은 영광(靈光)을 본관으로 한 부윤 규(規)가, 대낮에 몸종을 건드려 세상에 튀어 나온 얼(蘖)짜다. 양민이 양반 첩실이 되어 낳은 아들은 서자(庶子)라했고, 천박한 비첩이 몸을 앗긴 끝에 내 놓은 사내는, 엄연히「서자」와는 비교가 되지 못하는 이른바「얼치기 물건」이라하여「얼자」로 구분하였다.
유자광은 아비가 낮잠을 자다가 호랑이가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놀라 깨, 곧바로 마누라를 덮쳐 수태를 시키려했으나, 아내가 명색이 대갓집 아녀자라는 체면을 지키느라,「영감이 정신이 어찌 됐나!」하며 도망치니, 유규는 모처럼의 꿈이 김이 새 날라 버리지나 않을까 싶어 손으로 입을 가려 다문 채, 마침 채마밭에서 남새를 캐 들어 오는 몸종을 다짜 고짜 눕혀 만든 씨앗이 바로 유자광이었다.
유자광은 아비가 현몽한 대로 공드려 만든 씨앗 답게 예사로운 동물이 아니었다. 그는 재빨리 자기의 출세 길은 오직 무술 뿐임을 간파, 자나 깨나 무력을 길러 정통성 없는 세조의 불안한 처지를 감싸는데 공을 세워 일약 공신 반열에 올랐으니, 과히 보통이 넘는 특출이었다.
유자광의 운명을 가른 사건은 곧 세조의 왕권 찬탈에 반기를 들고 함경도에서 거병한「이시애(李施愛)의 난」이었다. 처음 세조 앞에서 힘 자랑 끝에 얻은 자리가, 궁궐을 지키는 보잘것 없는 갑사(甲士)였다가, 함경도에서 문제가 발생하니,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세조는 불안했다. 그때 유자광은 「이때다」싶어 반란 진압군 선봉이 되기를 자청했다.
다급했던 세조는 흰놈 검은 놈 가릴 것 없이 유자광을 기용했다. 마침내 난이 진압 되니, 세조는 유자광을 일약 오늘날의 국방부의 핵심자리 격인 병조정랑에 앉히니,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유자광이 본색을 들어 내 꾸민 첫 만행은 곧 직속상관이던 병조판서 남이(南怡)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자신은 익대공신 1등에 책록 돼, 그 어떤 양반도 내려다 보는 위치에 오른 일이었고, 연산군 때 무오·갑자 두 사화를 꾸민 핵심 역할을 맡아, 참신한 젊은 선비들을 싹쓸이로 몰아 죽인 일이었다.
음험하기 비길데 없는 유자광의 본색이 천하를 더럽히자 세상이 통째로 어둠에 잠긴 것 같았다. 오죽했으면 사관들이 이렇게 기록 했을까.
『조정에서는 유자광을 독사처럼 여겨 감히 그의 뜻을 거스리지 못하고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1506년 중종 반정때는 발빠르게 혁명 주체 성희안(成希顔)에게 붙어 다시 정국공신 1등에 책록 되고 무령부원군(武寧府院君)에 봉해지니, 그는 세조 이후 중종까지 내리 다섯 임금을 거치는 동안에 부지기 수의 양반을 해친 대죄를 범하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높은자리에서 호사를 누린 간특한 악덕배였다.
그러나 계산이 안되던 유자광의 광기(狂氣)도 한계가 있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하지 않았던가. 반정 이듬해 개편된 조정은 유자광을 그냥 두질 않았다.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수장들의 잇따른 탄핵 상소로 천하의 유자광도 배겨 나질 못했다. 그는 결국 강원도 벽지로 귀양을 가야했고, 이어 경상도 변방으로 옮겨졌는데 그만 눈이 멀어 버려 앞을 보지 못하는 병바리가 되었고 그런 두 해 만에 명줄이 끊겼다.
요망한 유자광은 자기가 죽은 뒤에, 저지른 죄값을 하느라 부관참시를 면치 못할 것을 미리 알고 대비했다.
자기와 모습이 닮은 자를 찾아 종으로 삼았다가 그 종이 죽자 큰 인물이 죽은 것처럼 꾸며 장사 지내고 무덤을 극히 호화롭게 꾸며 주었다. 그런 뒤 자기가 죽게 되자 처자들에게 일렀다.
“내 묘는 평장(平葬)으로 묻어 봉분을 짓지 말 것이며, 만일 조정에서 사람들이 나와 내 묘를 묻거든, 죽은 종의 무덤을 가리켜 주라”
한참 뒤 조정에서 「유자광은 마땅히 부관참시로 죄를 물어야한다」는 공론이 일어 의금부 나졸들이 유자광의 무덤을 찾으니, 집 사람이 종의 무덤을 가리켜 주었다. 나졸들도 석물이 잘 갖춰진 종의 무덤을 유자광의 무덤으로 알고 묘를 파헤쳐 종의 해골에 칼질을 했고, 유자광의 해골은 아무 탈이 없었다. 옛 사람들이 기록하여 남긴 이야기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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