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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93

by 까망잉크 2018. 10. 29.
<조선왕조 뒷 이야기>93



도학정치가로 조선의 흐린 정국을 한번 바꿔 보려던 조광조가, 기득권세력들의 저항으로 좌절 당해, 오늘날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 일대를 말하는 능성(綾城)에 귀양을 살고 있었다.

그의 본관은 한양(漢陽), 아버지는 어천(魚川) 찰방(察訪) 조원강(趙元綱). 마지막 관직은 사헌부대사헌, 지금의 감사원장 쯤 되는 막강한 자리였다. 


중종14년(1519) 11월, 심정(沈貞)·남곤(南袞) 등의 간교한 모략을 받은 끝에 능성까지 내려가 귀양을 살고 있는데, 다음달 12월, 한달 만에 그는 죽음을 맞고 말았다. 


금부도사 유엄(柳엄)이 사약을 갖고 내려와 형을 집행하는데, 약을 들이키기 전에 그는 유엄에게 물었다.
“심정은 지금 무슨 벼슬에 있는가?”
유엄이 대답하기를 「정승에 올랐다」했다. 조광조는 기가 막혔다.
“그렇다면 내가 죽지 않을 수 없겠구나!”
조광조는 지켜 보는 측근들에게 일렀다.
“내가 죽어든 관(棺)을 얇게 만들어 먼길 운반하는데 편하게 하라!”
말을 마치자 마지막으로 한 수의 글을 읊었다.



愛君如愛父 
임금 받들기를 아버지 처럼 했고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길 내집 같이 했네
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세상을 굽어 본다면
昭昭照丹忠 
거짓 없는 이 붉은 충정 비쳐 주리



조광조가 약을 마셨으나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나졸들이 달겨 들어 목을 조르려하니, 그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성상께서 내 목을 보전하려 하시는데, 너희가 어찌 감히 이러느냐!”
곧 독한 술을 한사발 가져 오게하여 마시고 쓸어져 눈·코·입 등 이른바 칠규(七竅)로 피를 쏟으며 숨을 모았다. 아까운 나이 38세. 


그는 왕이 목을 치는 효수(梟首)형을 내리지 않고 사사(賜死)형을 내린 것을 조금은 고맙게 여겼던 것이다. 


이듬해 봄 조광조의 관이 소 달구지에 실려 경기도 용인 고향땅 심곡리에 옮겨져 안장됐다. 성수침(成守琛)·홍봉세(洪奉世)·이충건(李忠楗) 등 명망 있는 제자들이 장사를 치르며 서로 붙들고 통곡했다. 


이튿날은 조광조를 대신(大臣)으로 추천했던 이연경(李延慶)이 달려와 울면서 술잔을 올렸다. 함께 밝은 세상을 꿈궜던 박상(朴祥)은 이렇게 읊고 서러워했다.



不謂南臺舊紫衣 
누가 알았으랴, 자주 옷 대신이
牛車草草故鄕歸 
소 수레 실려 고향에 돌아 올 줄
他年地下相逢處 
다음 지하에서 만나 거든 
莫話人間萬事非 
세상 그릇 된 일은 말하지 마세

分手院前曾把手 
작별 할 때 두 손을 서로 잡았었는데
怪君黃閣落朱崖 
괴이하다, 그대 황각에서 주애로 떨어지다니
朱崖黃閣莫分別 
주애와 황각을 분별하지 말라
經到九原無等差 
먼 근본에서 보면 차이가 없으리니.

「황각(黃閣)」은 대신들의 근무처인 궁궐을 말하고「주애(朱崖)」는 중국의 궁벽한 귀양지였다.


조광조가 죽던 날 그의 아우 숭조(崇祖)가 달려 가 길가에 주저 앉아 하염 없이 우는데, 한 노파가 산골에서 내려와 역시 울면서 
“낭군은 무슨 일로 우느냐?”며 말을 걸었다. 조숭조가 말하기를 
“나는 형님이 죽어 울지만 노파는 어찌하여 우는가?” 했다. 노파는
“들으니 나라에서 조광조를 죽였다 하니, 선인(善人)이 죽으면 백성들이 반드시 살기 어려울 것이라 슬퍼서 운다!”


조광조가 세상을 떠 날 때 큰 아들 정(定)은 다섯 살, 둘째 아들 용(容)은 두 살 된 젖먹이였다. 큰 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조용은 뒤에 군수에 이르렀으나, 슬하가 없어 4촌의 아들 조순남(趙舜男)이 뒤를 이었다. 


훗날 조용이 나주판관 시절 율곡 이이(李珥)에게 아버지의 묘지명(墓誌銘)을 써 달라 부탁했더니, 이이는 말미에 이렇게 썼다.
『…정암(靜庵-조광조 호』선생 불세출의 기운은, 한나라 산악에서 정기를 모아 왔네. 곤륜산 조각 구슬 끊어지고 떨어져서 잘게 된 구슬 일세. 높은 식견 일찍 지녀 도덕을 구하는데, 정로(正路)를 밟으셨도다(생략)』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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