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50)흥모
전생에 오누이였나 싶을 정도로 항상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는 필조와 검은고양이 ‘흥모’
어느 날 집에 불이 나 그녀가 위험에 처했다! “야옹, 캬악~”
도움 요청에 뒷집 총각 ‘상구’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는데…
필조네 집에는 쥐가 한마리도 없다. 영리한 쥐잡이 흥모 덕택이다. 흥모와 필조는 전생에 오누이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필조가 걸어갈 때 흥모는 졸졸 따라다니고, 앉을 때는 치마폭에 쌓여 있고, 누울 때는 품속에 안겨 있다.
필조는 꽃다운 이팔청춘이고 흥모는 검은 고양이다. 필조네 집 대대로 내려오는 검은 고양이 흑묘(黑猫)를 사람들은 그저 흥모, 흥모라 불러 흥모는 흑묘라는 뜻도 모르고 흥모가 됐다.
필조네 집은 볼품없는,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는 소농이지만 필조의 미모는 빼어나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필조네 집에 불이 났다. 필조가 집 안에 갇혔다. 시뻘건 불길이 춤을 추자 누구 하나 집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못 내는데 뒷집 총각 상구가 근처 개울에 몸을 풍덩 던졌다가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필조가 어디 있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데 흥모가 “야옹, 캬악” 외쳐 뒷집 총각 상구가 달려가 필조를 이불에 싸서 안고 나왔다. 쾅. 그때 대들보가 내려앉으며 뒷집 총각 상구를 덮쳤다. 필조는 머리카락만 조금 탔을 뿐인데 대들보에 짓눌린 상구의 허리는 펼 수가 없고 얼굴은 화상으로 진물이 났다. 여섯달 만에 일어난 상구는 꼽추가 됐고 얼굴은 인두질한 것처럼 번들거렸다.
상구는 대낮에 나들이하는 게 낯설어졌다. 어느 날 밤 혼자 주막에 가 술을 마신 뒤 집에 들어와 제 방에 벌러덩 누워 긴 한숨을 토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살짝 열리고 누가 들어와 부스럭 치마를 벗고 그의 품에 안겼다. 필조였다.
이튿날부터 필조네 집을 들락거리던 매파들의 발길이 끊겼다. 상구와 필조는 조촐하게 혼례를 올렸다. 상구는 외가 쪽 먼 친척인 천석꾼 부자 우 참사네 집에 집사로 들어가게 됐다. 상구는 몸은 불구가 됐지만 머리는 똑똑했다. 어릴 적에 제 할아버지한테서 글을 배워 치부책을 빈틈없이 정리했다.
사람들은 병신이 경국지색 마누라를 얻었다고 이상한 눈초리를 보냈지만 필조는 개의치 않았다. 상구는 생명의 은인이자 존경스러운 신랑이었다. 필조는 음식 솜씨가 좋아 우 참사네 찬모가 됐다. 상구는 수많은 소작농의 원성 한마디 듣지 않고 공정하고 정확하게 관리했다. 필조는 부엌을 맛깔스러운 음식의 산실로 만들었다.
3년 후에는 새경을 모아 저잣거리에 고급요릿집을 차리는 청사진을 그리며 그들은 환희의 포옹을 했다. 야옹. 그걸 아는지 흥모도 장단을 맞췄다. 그들의 운명을 덮칠 먹구름이 몰려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우 참사 부인의 친정어머니 생신에 집사 상구가 안방마님과 동행을 했다. 그날 밤 우 참사가 필조를 덮쳤다. 은장도를 꺼내 휘두르다 우 참사 손아귀에 잡혀 넘어지며 필조 배에서 유혈이 낭자했다. 손 써볼 겨를도 없었다.
돌아온 상구는 죽은 필조를 안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뒷산에 필조를 묻고 상구는 묘지 옆 엉성한 움막에서 식음을 전폐한 채 실성했다. 얼마 후 그는 묘를 안고 필조를 따라갔다. 관가에 잡혀갔던 우 참사는 금방 풀려났다.
허구한 날 우 참사가 선비들과 어울리는 사랑방 앞에는 기묘하게 생긴 모과나무가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잎은 모두 떨어뜨린 채 노란 모과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지난해에 담가둔 모과주를 마시며 문객들은 사랑방 문을 열고 우 참사네 모과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느 날 문객들 앞에서 모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두둑, 두두둑. “어어어.” 검은 고양이 흥모가 모과나무를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모과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우 참사가 다락에서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흥모를 빗나가 마당에서 놀고 있던 우 참사 삼대독자 손자의 목에 꽂혔다. 순식간에 마당은 선혈이 낭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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