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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탕에 빨간 공을 그린 당구장 창문 간판은 철거하거나 다른 색으로 바꾸도록 할 것."
서울시가 1986년 3월부터 시행한 '간선도로변 광고물 정비 지침'에 희한한 금지 조항이 포함됐다. "이런 간판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때 찾아올 외국인들에게 자칫 일장기로 오인돼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게 금지 이유였다(조선일보 1986년 7월 10일 자).
당구장 간판을 놓고 '일장기' 운운한 당국의 무리수가 쓴웃음을 짓게 하지만, 이 기사에서 읽히는 사실이 또 하나 있다. 행정 기관이 간판 모양까지 신경 써야 할 정도로, 1980년대 중반 한국의 당구장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사실이다. 1986년 전국의 당구장은 무려 4만여 곳으로 추산됐다. 오늘의 2배 가까운 숫자다. 한때 동네마다 넘쳤던 비디오 대여점만큼이나 많았다. 전두환 정권이 1981년 '대민 행정업무를 개선'한다며 당구장 허가 조건을 완화한 게 급증의 계기가 됐다.
1980년대 당구 전성시대가 오기까지 숱한 곡절이 있었다. 일제 땐 '홀딱 반하도록 재미있는 놀이'라며 신사(紳士)들 유희로 확산됐던 당구가 대중오락으로 자리를 굳힌 건 195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명동의 '어른들 놀이터' 중 베이비 야구장, 기원(棋院), 댄스 홀 등이 낮엔 모두 파리를 날렸지만, 유일하게 붐비는 게 당구장이었다. 끼니도 잊고 치다가 배고프면 짜장면을 시켜 먹는 유행도 1950년대에 이미 시작됐다. 서울역 앞 당구장엔 기차표를 사 놓고 치다 열차 시간이 됐는 줄 알고도 게임을 중단하지 못해 차표를 날려버린 사람이 매일 두서너 명씩 꼭 있었다(동아일보 1956년 8월 27일 자). 여름이면 해수욕장 백사장에도 노천 당구장이 열렸다.
확산되던 당구 열기는 1961년 5·16 직후 잠시 얼어붙었다. 당구장은 유흥업소와 나란히 '공무원·학생들의 출입금지 구역'으로 선포됐다. 하지만 당구 붐이 다시 일어나는 데는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1963년 대학생 1000명을 조사한 결과, 남학생 중 66.6%가 '당구를 할 줄 안다'고 답했다. 그중 100점 이상 되는 실력자가 37.5%나 됐다. 1966년 조사에선 서울대생들이 가장 자주 들르는 곳 1위가 당구장(40%)이었다.
그럼에도 당구장엔 어딘지 불건전한 공간이란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1993년 헌법재판소가 미성년자의 당구장 출입을 금지한 법률을 위헌으로 결정, 당구장 문호를 청소년에게도 개방한 뒤에도 사회의 시선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당구장이란 담배 연기 자욱한 아저씨들의 놀이터로 여겨졌고 영화에선 건달들의 소굴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그랬던 당구장이 요즘 완전히 달라져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금연구역이 된 데다 카페처럼 깔끔하게 꾸민 곳도 늘어 다양한 세대의 문화 공간으로 인기다. 특히 중·장년들은 당구에 흠뻑 빠졌던 젊은 시절에 대한 향수로 다시 큐를 잡는다. 요즘 같은 때에 돈이 적게 든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전기료 한 푼 들이지 않고 게임의 짜릿한 스릴을 맛보게 하는 '언플러그드 오락'의 생명력이 느껴진다.
김명환 前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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