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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젊은 혈기 性에 쏟게 한다"

by 까망잉크 2019. 2. 22.

 

 

 


[김명환의 시간여행] (39) 유신 시절 등장한 '피임기구 자판기'…

 

"젊은 혈기 性에 쏟게 한다" 비판도


 발행일 : 2016.10.12 / 여론/독자 A32 면 
 기고자 : 김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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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어느 날 고궁과 유원지 매점마다 놓인 낯선 철제 박스가 나들이 나온 시민들 시선을 붙들었다. 50원 동전 1개를 넣으면 콜라, 사이다가 컵에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음료 자판기의 첫 등장이었다. 일회용 컵이 없던 때여서 앞 손님이 사용한 플라스틱 컵을 물로 씻어 써야 하는 불완전한 장치였다. 돈만 넣으면 기계가 지체 없이 음료를 대령하자 언론은 '상냥한 상혼을 가졌다'고 표현했다.

이 기계의 국내 상륙 전부터 신문엔 서구의 자판기 문화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소개됐다. 1959년엔 "영국에서는 수줍어하는 처녀들을 위해 자동 기계가 '부라쟈(유방대)'와 '빤티' 등을 판매한다"는 기사가 보인다. 소설가 정비석은 1960년 미국 여행 중 담배, 콜라에서 우표까지 자판기로 파는 것을 보곤 "미국인의 일상생활은 너무도 기계적인 것 같다. 외상이란 어림도 없겠다"라고 혀를 찼다.

유신 시절인 1975년엔 또 한 가지 자판기가 국내에 새로 등장했다. 남성용 피임기구(콘돔) 자판기였다. 대대적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던 대한가족계획협회가 미국에서 들여와 서울역 등의 화장실에 설치했다. 당시엔 콘돔을 약국에서만 팔았기 때문에 많은 남성은 약사에게 낯을 붉혀가며 사야 했다(조선일보 1973년 3월 16일자). 협회는 무인 자동판매기라면 피임기구 구입이 훨씬 편해져 호응이 클 것이라고 봤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자판기조차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많아 판매가 신통치 않았다. 일각에선 "남녀 간 무분별한 성행위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서울대 모 교수는 "데이트 중 화장실에 들렀다가 피임기구 자판기를 발견한다면 젊은이들은 '옳지, 저거다' 하고는 심리 반응을 일으킬 것 같다"며 호텔·여관 업자에게나 도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프리 섹스 풍조를 불러일으켜서 젊은이들 혈기를 그 방면으로 뽑아버릴 수 있는 효과가 있을는지는 모르지만…"이라는 의미심장한 언급도 덧붙였다.

자판기의 꽃인 커피 자판기의 시대는 1978년 열렸다. 웬만한 회사 빌딩마다 1대씩 놓여, 인근 다방을 울상 짓게 만들었다. 직장인은 달콤한 자판기 커피 맛에 중독돼 갔지만 언론은 '인간끼리의 접촉 없는 상행위는 비인간적'이라며 자판기를 '괴물'이라고 냉소했다. '이러다간 2000년대쯤엔 외로운 홀아비가 동전을 넣으면 미모의 여성 복제 인간이 불쑥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라는 말도 나왔다. 어느 대기업이 '자동판매기 한 대가 아빠 봉급을 앞질렀어요'라고 광고하자, 한 시민은 "10년 동안 일한 내가 100만원짜리 기계보다 못하다니 허탈하다"고 토로했다.

오늘날 자판기는 첨단 장치도 아니고 괴물도 아니다. 없으면 불편한 편의시설일 뿐이다. 지난주 대구시의 서비스업 종사자를 위로하러 찾아간 대학생들은 '감정 자판기'라는 대형 박스 속에 들어앉아 판매구 밖으로 손만 내밀어 사랑, 위로, 칭찬을 전했다고 한다. 때론 직접 눈 맞추고 대면하기가 부담스러워 자판기 같은 비(非)대면 소통이 더 편하다고 여기는 세대다. 기계와의 거래가 비인간적이라고 목청 높였던 옛 자판기 비판론자들은 이런 시대가 올 줄 알았을까.

김명환 前 사료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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