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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가뭄이 석 달째 이어지던 1967년 8월 21일, 전남 나주군 어느 산속에서 무려 1500명이 넘는 부녀자가 경찰과 대치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일부 주민은 곡괭이나 호미도 들고 있었다. 온 천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가뭄으로 고통받던 농민들이 "명산(名山)에 묘를 쓰는 잘못을 한 바람에 노한 산신께서 비를 내리지 않고 있다"며 남의 무덤들을 파내겠다고 총출동한 것이다(동아일보 1967년 9월 14일 자).
어처구니없는 미신은 옛 시절 가뭄 때마다 고개 들었다. 1967년 큰 가뭄 때 묘를 파헤친 사건은 전남 도경에 보고된 것만 13건이었다. 이 기괴한 습속의 뿌리는 깊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엔 지방 행정기관까지 묘지 훼손에 가담했다. 1929년 8월 전북 지방에 50여 일째 비가 오지 않아 민심마저 흉흉해지자 면사무소까지 나서 3일간 묘 50여 기를 파냈다. 신문은 "한갓 미신 때문에 백골이 큰 난리를 당했다"고 혀를 찼지만 이런 일은 그치지 않았다. 1960년대엔 애타게 비를 기다리던 주민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무덤을 파내자"고 의견을 모으면서 1000명 안팎의 군중이 모여들어 산에 올랐다. 조상 묘에 날벼락을 맞게 된 묘주들이 가로막으려다 유혈 난투극도 벌어졌다. 가뭄 때는 시장, 군수가 제주(祭主)가 되어 기우제를 지내는 일도 허다했다. 분묘 파헤치기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위법 행위라는 게 문제였다. 그 시절 경찰은 '논에 물 대려고 다투다 빚어지는 살인 사건', '홧김에 저지르는 농민의 방화'와 함께 '묘지 발굴'을 가뭄 때 가장 주의할 3대 사건으로 꼽았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은 비를 기원하는 미신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비난했다. 60년 만의 큰 가뭄이 닥쳤던 1968년 여름, 호남 한해(旱害) 지역을 찾아간 박 대통령은 "공무원들까지도 주민들과 어울려 돼지를 잡아 기우제를 지내는가 하면 묘를 파헤치는 등 무지한 짓들을 하고 있다"면서 "그럴 시간이 있으면 들에 나가 한 자의 샘이라도 더 파라"고 언성을 높였다. 대통령이 너무 심하게 꾸짖어 관계자들이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조선일보 1968년 8월 4일 자). 이후 묘지 파헤치기는 한동안 쑥 들어갔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1992년 가뭄 때도 남의 무덤을 건드린 사건이 있었다.
분묘 훼손은 명백한 위법인데도 경찰은 강경 대응하지 않았다. "불법임은 분명한데, 가담 주민들이 너무 많고 동기도 가뭄 피해 때문이어서 섣불리 개입할 수 없다"고 난감해하기도 했다. 신문 지면에도 "오죽하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표현이 보인다. 가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그만큼 위험하게 여긴 것이다.
"근 40년 만의 최악"이라는 가뭄이 지금 닥쳤다는데 농민들만 애태우는 듯하다. 거국적으로 민심을 걱정하는 분위기는 40년 전과 비교도 안 된다. 대통령은 수질 개선을 위해 낙동강, 금강, 영산강의 6개 보(洑) 수문을 6월 1일부터 개방하라고 지시까지 하는 바람에 농민들은 물 끌어오기가 어려워질까 걱정만 커졌다. 전력 생산의 상당 부분을 수력 발전에 의존했던 과거엔 가뭄이 산업의 중추를 흔드는 재앙이었다면, 오늘엔 좀 다를지 모른다. 그래도 마음까지 말라가는 고통이 단지 농민들만의 문제인가. 깊은 가뭄엔 식음을 전폐했다는 옛 임금처럼은 아니어도 국가 지도자라면 타들어 가는 농심과 민심을 좀 더 헤아리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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