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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편지 왔어요"

by 까망잉크 2019. 2. 26.

 

 

 

 


[김명환의 시간여행] (120) 수천 가구가 같은 번지…서울에 20곳, 집배원들

 

"편지 왔어요" 확성기 방송


 발행일 : 2018.05.30 / 여론/독자 A33 면 
 기고자 : 김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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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박○○씨! 편지 왔습니다! 집에 계시면 좀 나와 보세요!"

서울 관악구 어느 주택가에선 핸드 마이크로 주민들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종종 울려 퍼졌다. 편지를 배달하러 온 집배원의 소리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수신인의 집을 찾을 수 없자 최후의 수단으로 시도한 '가두방송'이었다. 1984년 1월의 일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빚어진 건 이 일대 수천 가구의 주소가 모두 '산(山)81번지'로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시유지나 국유지에 지은 무허가 주택들이어서 등기부에 오르지 못했기에 집집마다 호수(號數)를 지정받지 못했다. 이런 '동일 번지 지역'은 1984년 서울에만 20여 곳이나 됐다. 심한 경우 같은 번지에 5000여 가구가 몰려 살았다. 올림픽 개최를 4년 앞둔 서울의 모습이 그랬다(조선일보 1984년 1월 8일 자).

산업화에 땀 흘리던 시절, 우리의 주소 체계는 뒤죽박죽인 곳이 많았다. 번지와 호수는 집이 늘어선 차례대로 매겨져 있지도 않았다. 경찰이 범죄 용의자 집의 번지수를 알아내고도 통·반을 모른 탓에 검거하지 못하고, 화장품 행상은 월부로 물건을 판 뒤 구매자 주소만 갖고 집을 찾으려다 실패해 물건값을 못 받기도 했다(경향신문 1974년 6월 3일 자).

가장 골탕을 먹은 건 우편집배원들이었다. 수천 가구의 번지수가 같은 동네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건 '종로에서 김 서방 찾기'였다. 자구책으로 어떤 집배원은 가구주 이름을 적은 약도를 그려 들고 다녔다. 그래도 우편물의 1%쯤은 배달에 실패했다. 이럴 경우 반송했지만 발신인 집마저 못 찾으면 폐기했다. 1977년 한 해 전국 우편물 7억5230만 통 중 62만9607통이 반송조차 못 되고 소각됐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주소를 한자(漢字)로 적은 편지들이 집배원 애를 먹였다. 1967년 11월엔 한자를 잘 모르던 집배원이 한자 주소가 적힌 편지 84통을 야산에 묻었다가 구속됐다. 가끔 일어나는 이런 일을 언론은 '편지 매장(埋葬)사건'이라 불렀다.

집 찾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당국은 '문패 달기 운동'을 매년 벌였다. 그래도 1968년 서울의 57만 가구 중 문패 없는 집이 24만(42%) 가구나 됐다. 어느 우체국은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격으로 관내 문패 없는 집에 문패를 만들어 붙였다. 하지만 일부 주민은 "왜 멋대로 이런 걸 붙이느냐"며 떼어냈다.

우편물 배달을 둘러싼 사건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 23일엔 한 집배원이 6·13 지방선거 후보의 공보물을 우편함 앞에 쌓아놓고 가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하는 해프닝이 빚어졌다. 옛 '편지 매장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었지만, 해당 집배원은 선거 우편물이 폭증해 다음 날 처리하려고 쌓아놓았다고 해명했다. 집배원의 의무를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4000만 통이 넘을 것이라는 선거 우편물을 처리하기 위해 우정 당국에 초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집배원이 격무에 지친 끝에 일어난 일이니 무조건 집배원만 탓하기도 어렵다. 제한된 기일 안에 무언가를 정확히 배달해야 하는 일의 고단함이란 몇십 년째 변함이 없음을 확인할 뿐이다.

김명환 前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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