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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의 기록들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by 까망잉크 2021. 10. 5.

 

 

서울 흥인지문의 내측 전경

 

개설

보물 제1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동쪽 문으로 일명 동대문(東大門)이라고도 하는데, 서울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내용

1397년(태조 6) 도성을 쌓을 때 함께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세워졌다. 1452년(단종 1)에 중수가 있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존속되어오다가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전반적인 개축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흥인지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계형식(多包系形式)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문의 기부(基部)는 화강암의 대석(臺石)을 잘 다듬어 무사석(武砂石: 네모 반듯한 돌로 쌓아올린 축석)을 이루고 중앙에 홍예(虹霓: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어 출입구를 삼았으며, 기부 위에 목조의 2층 누각을 세웠다.

문의 바깥쪽에는 무사석 한쪽에서부터 반원형의 평면을 이룬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쳐서 적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쌓아 적에 대한 방비를 견고히 하였는데, 도성 내의 여덟 개의 성문 중 옹성을 갖춘 것은 이 문뿐이다. 이 옹성 역시 창건될 때부터 마련된 것이며, 고종 때 다시 개축되었다.

옹성의 벽은 두껍게 화강석 마름돌을 앞뒤로 쌓은 위에 내외 겹으로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돌리고 여장에는 총안(銃眼)을 만들었으며 옹성 위로는 파수꾼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무사석 위 주변에는 누각을 둘러막은 여장을 벽돌로 쌓고 양측에는 작은 일각문 형식의 협문을 하나씩 두어 누각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기부에 놓인 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걸고 공포(栱包)를 짰다. 공포는 하층은 내3출목, 외2출목이며 상층은 내외 모두 3출목이다. 그 형식은 조선 말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데 살미[山彌]가 뾰족이 외부로 뻗어나와 수서[垂舌]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내부의 살미 끝이 운공(雲工)으로 되었으며, 기둥 위에 안초공(安草工)을 두고 있다.

가구(架構)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고 상하층의 대량(大樑)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고 맞끼어져 연결되었으며, 안쪽 네 귀퉁이에 고주를 세운 것이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 우주(隅柱: 모서리기둥)를 이룬다. 상층의 변주는 하층 대량 위 중간쯤에 세워졌다.

바닥은 하층에는 중앙에만 마루를 깔고 상층은 전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벽의 하층은 모두 개방하고 상층은 사방에 판문(板門)을 달았다. 천장은 연등천장[椽背天障]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의 각 마루에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배치하였다.

 

<출처> 다음 백과.   

 

서울 흥인지문 정측면 전경

 

 

흥인지문 외측면

서울 흥인지문 정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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