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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한눈에 보는 조선왕조실록 근대 편 2

by 까망잉크 2022. 3. 5.

 

 

한눈에 보는 조선왕조실록 근대 편 2

흥선 대원군은 구세주인가? 혼군인가?

by제이티Feb 22. 2022

 

 . 히어로 흥선 대원군의 등장

 

애초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왕위에 오른 농촌총각 철종은 의지와 무관한 민란으로 괴로운 14년의 왕 노릇을 하다가 1863년 죽었다.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지만 조선은 이제 공식이 있었다. 왕실의 적당한 후손을 찾아낸 다음 ‘국왕 과외’를 시키고 그동안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왕을 장가보내 외척을 붙여주고 친정하도록 돕도록 하면 된다. 이미 시나리오가 나왔으니 이제 캐스팅만 하면 된다. 사도세자의 아들로 이어지는 은산군-남연군-흥선군-’명복’(고종) 족보에서 나이가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흥선군의 둘째 아들이 캐스팅된다. 안동 김 씨의 세력을 쫓아내려는 대비와 아들을 왕위로 올릴 절호의 기회를 맞은 흥선군이 팀을 결성한 결과 명복 소년이 조선의 26대 왕 고종이 된다.

 

세도정치 수십 년에 벼슬은 어느새 돈으로 거래되었고 벼슬을 산 이들은 세금 착취에 달인이었다. 나라의 곳간은 비어 갔고 백성들은 굶주렸다. 세도가에게 빼앗긴 권력을 되찾고 다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왕국을 만들기는 모름지기 왕이라면 누가 이루고 싶은 목표일 것이다.

일단 무너진 왕토 사상을 복원한다.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호포법이 실시된 것이다. 가장 큰 문제였던 환곡의 문제를 사창제를 시행함으로써 수백 년 묵은 폐단들이 과감하게 개혁되었다. 백성의 생활은 개선되었고 백성들은 환호했지만 양반 기득권층은 불만이 컸다. 그리고 그다음 전국 서원을 전수 조사한다. 서원은 본래 조상의 제사와 사대부들의 교육목적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이를 기반을 두고 당쟁의 본거지로 자리 잡아 문제점이 많았다. 몇몇 서원이 중앙정치를 좌우하던 때도 있었다. 또한 그 자체가 지방의 권력기관으로 자리 잡아 백성 위에 군림했다. 하지만 자칫 서원 개혁은 양반 사대부와 전면전이 될 수도 있는 커다란 사안이었다. 그러나 고종 2년 3월 돌연 만동묘를 폐지를 명했다. 만동묘가 어디인가 사대부들의 수장 송시열의 뜻에 따라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을 제사 지내던 곳이다. 조선의 신하가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 조선이 있다는 게 서글프지만 사대부들의 사상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상징과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서원은 본래의 목적보다 군 면제와 세금 회피를 위한 수단으로 자리 잡아서 왕권강화를 위해 필수적으로 없어져야 할 곳임에 틀림없었다. 마침내 전국의 서원이 철폐하라는 명이 내려진다. 세종도 영조도 정조도 하지 못한 괄목할만한 업적임에는 틀림없다.

 

과감하고 거침없이 개혁의 마지막 종부 원대한 꿈인 왕권강화를 위한 마지막 종착역은 경복궁 중건이었다. 세종조처럼 강하고 위엄 있는 왕권의 기본인 경복궁은 한두 푼으로 지을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었다. 천하의 진시황제도 토목공사로 나라의 기운을 다 쓰고 무너졌는데 같은 실수가 나온 것이다. 도저히 공사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정부는 ‘당백전’을 발행한다. 말 그대로 동전 한 잎에 상평통보 100전이라는 고액 화폐인데 이런 화폐는 위조의 위험이 컸으니 이런 불량화폐가 시장에서 신임을 얻기는 불가능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땡전 한 푼 없다.’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당백전 한 푼도 없다는 소리였다. 정부가 억지로 시행했으나 당백전의 가치는 급격히 떨어지고 물가가 오르는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한다. 겉보기에 조선은 대원군이 바라는 모습으로 바뀌는 듯했다. 하지 3만 내 집(경복궁) 마련이 행복의 시작은 아니었다.

 

5. 조선은 문을 열어라. 두 차례의 양요

사대하는 청나라도 가르치는 일본도 서양의 군사적 힘 앞에 굴복하고 문을 열었다. 잦아진 이양선의 출현은 조선에도 조만간 총과 칼을 앞세운 서양의 통상 요구가 현실로 나타나리라는 예고와 같았다. 그리하면 어찌할 것인가? 대원군이 내린 선택은 옛 정책의 고수였다. 여전히 문을 걸어 잠근다. 하지만 서양과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대원군의 대외정책은 먼저 국내 문제에서 드러난다. 그때 대원군의 측근 인물로 그리스도교인 남종삼이 대원군에게 묘한 제안을 했다. 영국 프랑스와 결탁해서 러시아의 진출을 막자는 것이다. 솔깃해진 대원군은 의견에 따라 이미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기로 했지만 일이 틀어지자 돌변한 대원군은 전면적인 탄압의 길을 택했다. 조선 유자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을까? 아니면 냉혹한 계산에 따른 정치적 판단이었을까? 그 결과 1866년 2월 병인박해다.

 

한강의 피비린내가 채가시지 않은 그해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다. 대포까지 장착한 상선은 대동강을 거슬러오더니 관민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급기야 조선 군인이 대포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자 분노한 박규수는 적의 배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인박해는 조선이 일으켰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조선이 당한 경우지만 둘 다 제국주의 열강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그래서 곧이어 후유증에 시달려야 할 운명에 처했다.

한 달 후 병인박해 피해를 본 프랑스 신부들이 청나라로 탈출해서 텐진에 있는 프랑스 동양 함대 사령관 로즈를 찾아가서 조선의 사정을 전했다. 곧이어 로즈 제독은 1,500여 명의 병사를 태우고 출격한다. “야만적인 조선이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을 죽였으니 대가로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라고 야만적인 선언 하며 쳐들어온다. 병인박해가 부른 병인양요다. 종횡무진 돌아다니면서 갑곶진 광성진 등 불 지르고 조선 배가 보이면 대포를 쏘아 부숴버렸다. 전광석화 같은 적의 공습에 조선 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뒤이은 조선 정부의 조치는 거꾸로 프랑스군을 당황하게 만든다. 양헌수가 이끄는 특공대가 정족산성을 점령한 것이다. 결국 예상치 못한 전술에 질린 프랑스군은 함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여느 때처럼 가져갈 만한 보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외규장각 건물은 불을 질러 버렸다.

 

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는 조선에 커다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청나라도 일본도 격퇴하지 못한 양이를 무찔렀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더불어 서양 물품의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천주교에 대한 탄압도 더욱 강화되었다.

탄압을 피해 조선에서 탈출한 페롱 신부는 오페르트라는 독일 상인을 만났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기발한 작전을 세우고 바로 임금의 할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향해 달려갔다. 유교사회인 조선을 경악하게 한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다. 남연군의 관을 가지고 대원군과 통상 협상 천주교 허용 등을 담판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굴에 대비해 튼튼한 석곽을 마련했는데 이 때문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아비의 무덤까지 도굴하는 서양세력에 대한 대원군의 배척 의지는 강고해졌다. 병인양요에 셔먼호 사건에 도굴까지 서양은 오랑캐를 넘어 인간도 아닌 존재임에 확실했다.

 

프랑스는 물러갔으나 이번에는 셔먼호를 수장시킨 대가를 요구하는 미국이 쳐들어왔다. 1871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 군함 다섯 척과 1200명 병력이 또 조선 앞바다에 나타났다. 며칠 후 미군은 광성진을 공격했고 성체는 허물어졌으며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재연의 조선군 사망자는 350여 명 미군 사망자는 3명 그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곧이어 서울로 쳐들어 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은 얼마 안 가서 철군하고 말았다. 제국주의 열강이 그렇듯이 미국은 영토적으로 차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적인 조선의 개항이었고 이차적으로는 미국에 유리한 조건에서 개항이었다. 그런데 일본과 달리 조선은 개항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조선 정부의 조선은 분명해졌다. 서양 오랑캐와 싸워 이기든 지든 그것은 상관없다. 통상이든 뭐든 그들과 대화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대원군의 트레이드 마크인 “쇄국정책”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거기에 새겨진 문구는 ‘서양 오랑캐의 침략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라는 것인데 난세를 맞아 조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나라 바깥을 오로지 한 가지 색깔인 오랑캐라 매도하고 타도해야 할 적으로만 취급하는 정책이 과연 올바른 짓인지 알아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6. 대원군은 조선의 구세주?

 

대원군은 흔히 비변사 혁파 서원철폐 환곡 개혁 호포제 등 내부 개혁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경복궁 중건에 따른 당백전 발행으로 백성의 지지를 잃어 실패하고 말았다고 설명되곤 한다. 하지만 당백전 발행이 백성을 고통을 빠뜨리긴 했어도 정권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 조선 백성이 고통이 없는 시절이 있었던가? 개혁은 사실 대성공이었다. 60년 세도정치를 청산했으며 영조도 정조도 이루지 못한 서원 군역 환곡 비변사 권력 등 수백 년 묵은 병폐를 한 번에 청산한 군주가 과연 있었단 말인가? 그는 누가 뭐래도 조선의 구세주임에 분명했다.

 

그의 성공 요인은 무엇보다 그는 준비된 군주였다. 야인 시절부터 나라의 폐단을 충분히 살피고 개혁할 방법을 준비해왔다. 마침내 권력을 쥐자 준비해온 시나리오대로 차근히 해치워 나갔다. 기득권층이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고 명분을 앞세워 차례로 해치워 나갔다. 조선 사회 특징상 이러쿵저러쿵 논의만 하다가 끝난 사안이 대부분인데 불과 굵직한 내부 개혁이 10년조 차 걸리지 않았다.

또 하나의 요인으로는 세도정치라는 환경도 있다. 안동 김 씨가 권력을 장악한 환경에선 그 특정 가문만 제압해버리면 권력 장악에 문제가 없으니깐 말이다. 만약 노론 소론 같은 붕당이 존재했다면 강력한 집단 반발에 시달렸을 것이다.

 

또 하나 거듭된 양요로 인해 척사(서양 배척)를 주장하는 대원군에게 사대부들이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야박하다. 열강의 세계 침략과 전 지구의 자본주의화라는 시대 상황에 부응한 개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빗장 수비만으로는 축구를 이길 수 없다. 골을 넣는 공격이 필요한데 골을 넣는 방법을 몰랐다. 두 차례 양요에서 확인했듯이 명백한 기술 차이 전력 차이가 확실한데 척화비만 꽂는다고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전투(병인양요, 신미양요)에서 승리 때문에 근대화라는 전쟁에서는 패배하고 만 것이다. 하다못해 일본식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청나라식의 동도서기라도 수용해 발전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지구본을 가지고 온 소현세자를 의심한 인조처럼 대원군도 어쩔 수 없는 유자였다. 그것이 대단한 성공을 허무한 실패로 만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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