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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의 기록들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9-7

by 까망잉크 2022. 3. 28.

역사 발굴

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현 세종로네거리▶조선호텔 인근▶국세청 본청▶영풍문고 입구 로 네 차례 이사

  • 글: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
입력2003-11-27 17:40:00
은 ‘조선말 종로 네거리의 시전(市廛) 위치 평면도’다. 일제 때 경성부가 편찬 출판한 ‘경성부사(京城府史)’에 나와 있는 것을 박경룡의 ‘개화기 한성부 연구’ 104면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황성신문 주소에 ‘백목전’과 ‘면주전’이 나와 있고 이들간의 관계 속에서 황성신문의 위치를 지목해주는 ‘후곡’이란 말이 나와 있다.

에서 보면 백목전이 세 곳에 있고 면주전이 두 곳에 있다. ‘후곡’이란 ‘뒷골목’이란 뜻인데 백목전 뒤 골목에 있는 면주전이라고 하면 ‘면주전 A’가 틀림없다.

는 에서 백목전과 면주전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황성신문 사옥 터에 면주전이 둘 있다. 황성신문사가 면주전 둘을 다 사옥으로 썼을까 아니면 둘 중 하나만 썼을까. 전에 면주전 도가였던 집이라고 했는데 둘 중 어느 집이었을까.

필자는 아직 이에 관한 자료나 문건을 찾지 못했다. 둘 중 어느 집이든 이 곳이 현재 어느 지점이냐를 정확히 지목할 수만 있다면 황성신문의 사옥 터 찾기는 90% 이상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에서 A부분은 1911년에 삼각 측량법으로 측량해서 제작한 지도이고, B부분은 황성신문이 있었던 면주전의 위치를 나타내주는 약도이다. C부분은 1911년 지도에 나와 있는 당시의 형무소 한성전옥(漢城典獄)의 평면도(‘서울600年史’ 2권 153~154쪽)다.



우선 A부분의 지도를 보면 유치감이 있고 그 뒤쪽에는 ‘전옥후동(典獄后洞)’ 즉 전옥의 뒤 동네가 있다. C부분의 전옥 평면도를 보면 동쪽 서쪽 북쪽이 염가(閻家), 즉 민간인 집들로 되어 있다. 한성전옥에 대한 설명에는 동쪽 남쪽 서쪽이 염가이고 북쪽이 길로 되어 있다. 1911년 지도에서 보면 남쪽과 북쪽이 다 염가로 되어 있다. A부분의 지도에 전옥의 북쪽이 ‘전옥후동’으로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 즉 청계천 쪽이 전옥의 앞쪽이었음에 틀림없다. C부분의 전옥 평면도에서 대문이 아래쪽, 즉 남쪽으로 나 있음을 볼 수 있다.

B부분의 ‘백목전 후곡 면주점’의 위치를 A부분 지도에 대입해보면 황성신문 사옥이 있었던 이전의 면주전 도가는 전옥후동을 남북으로 가르는 작은 골목의 바로 동쪽, 즉 가장 작은 원으로 표시한 지점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황성신문 사옥은 한성전옥 뒷담 중간쯤에서 북쪽으로 난 작은 골목의 동쪽 바로 옆집이거나 옆의 옆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좀더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1927년의 ‘경성부 관내 지적목록’과 1929년의 ‘경성부 일필매 지형명세도’와 현재의 지도를 대비시킨 것이 다.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밝혀둬야 할 점은 서울 4대문 안의 경우 구한말 당시의 지형이 현재까지 크게 변하지 않고 있으며 구한말과 일제 초기에 매긴 주소도 큰 변동 없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도로를 냈거나 도로 폭을 확장했거나 큰 빌딩을 짓느라 지번을 합친 경우에는 일부 바뀌었으나 그럼에도 일제 때의 지도나 지적도는 옛날의 그 어떤 지점의 현재 위치를 찾는 데 대단히 유용하다.

1911년 지도에서 한성전옥 유치감으로 나와 있는 터가 1929년의 지도(지형명세도)에도 나와 있는데 주소가 ‘서린동 42-1번지’로 나와 있다. 1927년 지적목록에서 서린동 42-1번지 터를 찾아보니 대지가 824평 2합이고 소유자란에는 국유로 돼 있다. 1929년 지도에 북쪽으로 난 골목도 그대로 나와 있다. 이는 그 터가 한성전옥 터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29년 지도에서 서린동 42-1번지 터를 표시해 구분했다. 또한 1929년 지도상에서 이전 면주전 도가 터, 즉 황성신문 사옥 터에는 원을 그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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