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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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城新聞 옛터를 찾아서
현 세종로네거리▶조선호텔 인근▶국세청 본청▶영풍문고 입구 로 네 차례 이사
- 글: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
입력2003-11-27 17:40:00
제용감 터와 관련해 한 가지 부연할 것은 현재 종로구청 자리, 좀더 정확히는 종로구청 종합민원실 건물 입구 옆에 세워져 있는 제용감 터 표석(標石)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곳은 옛 제용감 터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 표석의 제목은 ‘정도전 집터’로 그 내용을 보면 정도전 집터에 제용감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돼 있다. 그 표석에 적힌 표문은 다음과 같다.
‘정도전 집터(鄭道傳 家址):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살던 집터. 후일 사복시(司僕寺), 제용감(濟用監)이 이 자리에 들어섰고 일제 때에는 수송국민학교(壽松國民學校)가 세워졌었다.’
이 표문에 따르면 ‘종로구청 자리가 조선조 초기에 개국 1등 공신 정도전이 살던 집터였고 그 뒤 사복시와 제용감 등이 들어섰으며 일제 때는 수송국민학교가 있었던 자리’라는 것.
에서 1834년경 지도와 2001년 지도를 대비시켜보면 현재의 종로구청 자리가 옛날 사복시의 남쪽 부분 일부에 들어서 있으나 사복시와 제용감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위 표석의 표문은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을 오도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정도전 집터 표석의 표문은 정확히 바로잡아야 한다. 또 제용감 표석은 제자리인 국세청 본청 앞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황성신문은 세 번째 사옥인 이곳 ‘전전(前前) 제용감 터’에서 4개월도 채 안 된 1904년 8월 초순 또다시 이사를 하게 된다. 이번에는 종로 네거리 종각 건너편 서린동 쪽으로 사옥을 옮긴다.
장규식 교수에 의하면 전 관리서(전전 제용감) 건물은 고종황제가 하사한 것이고 황성신문은 이로써 셋집살이를 청산하게 됐던 것인데 그 자리에 정부가 새로 농상공학교를 설립함에 따라 4개월도 채 안 되어 다시 이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 고종황제가 하사금을 내려 이 돈으로 종로의 전 면주전(명주를 팔던 가게) 도가(동업자들이 모여 장사에 대해 의논하는 집) 건물을 매입해 사옥으로 삼았다고 한다.
영풍문고 입구 자리가 마지막 사옥 터
황성신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사옥의 주소는 ‘中署 鐘路 白木廛 後谷 前 綿紬廛 都家 제20통 2호’였다. 황성신문은 이 사옥에서 1904년 8월8일부터 1910년 8월27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할 때까지 6년20일간 신문을 발행했으며 합방 후에도 한성신문(漢城新聞)이란 제호로 9월14일까지 2주간 더 발행하다 폐간됐다.
이 네 번째 사옥에서 황성신문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된다.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제에게 강탈되고 마는 과정 속에서 필봉을 휘둘러보려 했으나 엄청난 힘에 밀려 꺾이게 되었던 것. 1905년 11월18일 을사보호조약이란 미명하에 강제로 체결된 늑약(勒約)에 분노해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논설을 쓴 것도 이 사옥에서였다. 이 논설로 장지연 사장은 일본 경무청에 체포됐고 황성신문은 압수 정간을 당했다. 장지연 사장은 다음해 1월 하순 65일 만에 석방됐으나 사장직을 떠나야 했으며 황성신문은 2월부터 복간됐다. 이후 일제의 황성신문 탄압은 한층 심해져갔다.
황성신문이 이같은 수난을 겪으면서도 신문 발행을 계속했던 이 네 번째 사옥은 어디에 있었을까.
‘新聞評論’ 1975년 6월호에서 당시의 원로 언론인 3명은 옛 신문사의 사옥 위치에 관해 대담(‘金乙漢, 柳光烈, 崔慇喜 대담: 韓國의 新聞街, 舊韓末·日帝 때 解放直後’)하면서 ‘(황성신문이) 뒤에는 종로의 종각 뒤로 이전해서 발행했는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장규식 교수는 ‘개항기 서울의 개화·개혁운동 공간’이란 연구논문에서 ‘보신각 서쪽 건물을 매입하여 8월6일 이사를 하였다. 정확한 주소는 中署 鐘路 白木廛 後谷 (전 綿紬廛 都家) 20統 2戶…’라고 했고, 서울YMCA 도시문화·환경센터를 위해 집필한 ‘종로·북촌 문화산책’이란 소책자에서는 황성신문이 이사를 간 곳인 ‘면주전’의 위치를 현재 영풍문고의 종로 네거리 쪽 입구에 표시해놓고 있다.
장규식 교수가 명시적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의 언급을 연결하면 영풍문고의 종로 쪽 입구 옆에 표시한 ‘면주전’ 자리가 황성신문 사옥 터였다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이제부터 옛날의 지도와 자료 그리고 현재의 지도를 동원해 황성신문사 ‘종로 사옥’의 정확한 위치를 추정해보고자 한다.
‘정도전 집터(鄭道傳 家址):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살던 집터. 후일 사복시(司僕寺), 제용감(濟用監)이 이 자리에 들어섰고 일제 때에는 수송국민학교(壽松國民學校)가 세워졌었다.’
이 표문에 따르면 ‘종로구청 자리가 조선조 초기에 개국 1등 공신 정도전이 살던 집터였고 그 뒤 사복시와 제용감 등이 들어섰으며 일제 때는 수송국민학교가 있었던 자리’라는 것.
에서 1834년경 지도와 2001년 지도를 대비시켜보면 현재의 종로구청 자리가 옛날 사복시의 남쪽 부분 일부에 들어서 있으나 사복시와 제용감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위 표석의 표문은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을 오도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정도전 집터 표석의 표문은 정확히 바로잡아야 한다. 또 제용감 표석은 제자리인 국세청 본청 앞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황성신문은 세 번째 사옥인 이곳 ‘전전(前前) 제용감 터’에서 4개월도 채 안 된 1904년 8월 초순 또다시 이사를 하게 된다. 이번에는 종로 네거리 종각 건너편 서린동 쪽으로 사옥을 옮긴다.
장규식 교수에 의하면 전 관리서(전전 제용감) 건물은 고종황제가 하사한 것이고 황성신문은 이로써 셋집살이를 청산하게 됐던 것인데 그 자리에 정부가 새로 농상공학교를 설립함에 따라 4개월도 채 안 되어 다시 이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 고종황제가 하사금을 내려 이 돈으로 종로의 전 면주전(명주를 팔던 가게) 도가(동업자들이 모여 장사에 대해 의논하는 집) 건물을 매입해 사옥으로 삼았다고 한다.
영풍문고 입구 자리가 마지막 사옥 터
황성신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사옥의 주소는 ‘中署 鐘路 白木廛 後谷 前 綿紬廛 都家 제20통 2호’였다. 황성신문은 이 사옥에서 1904년 8월8일부터 1910년 8월27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할 때까지 6년20일간 신문을 발행했으며 합방 후에도 한성신문(漢城新聞)이란 제호로 9월14일까지 2주간 더 발행하다 폐간됐다.
이 네 번째 사옥에서 황성신문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된다.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제에게 강탈되고 마는 과정 속에서 필봉을 휘둘러보려 했으나 엄청난 힘에 밀려 꺾이게 되었던 것. 1905년 11월18일 을사보호조약이란 미명하에 강제로 체결된 늑약(勒約)에 분노해 사장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논설을 쓴 것도 이 사옥에서였다. 이 논설로 장지연 사장은 일본 경무청에 체포됐고 황성신문은 압수 정간을 당했다. 장지연 사장은 다음해 1월 하순 65일 만에 석방됐으나 사장직을 떠나야 했으며 황성신문은 2월부터 복간됐다. 이후 일제의 황성신문 탄압은 한층 심해져갔다.
황성신문이 이같은 수난을 겪으면서도 신문 발행을 계속했던 이 네 번째 사옥은 어디에 있었을까.
‘新聞評論’ 1975년 6월호에서 당시의 원로 언론인 3명은 옛 신문사의 사옥 위치에 관해 대담(‘金乙漢, 柳光烈, 崔慇喜 대담: 韓國의 新聞街, 舊韓末·日帝 때 解放直後’)하면서 ‘(황성신문이) 뒤에는 종로의 종각 뒤로 이전해서 발행했는데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장규식 교수는 ‘개항기 서울의 개화·개혁운동 공간’이란 연구논문에서 ‘보신각 서쪽 건물을 매입하여 8월6일 이사를 하였다. 정확한 주소는 中署 鐘路 白木廛 後谷 (전 綿紬廛 都家) 20統 2戶…’라고 했고, 서울YMCA 도시문화·환경센터를 위해 집필한 ‘종로·북촌 문화산책’이란 소책자에서는 황성신문이 이사를 간 곳인 ‘면주전’의 위치를 현재 영풍문고의 종로 네거리 쪽 입구에 표시해놓고 있다.
장규식 교수가 명시적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의 언급을 연결하면 영풍문고의 종로 쪽 입구 옆에 표시한 ‘면주전’ 자리가 황성신문 사옥 터였다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이제부터 옛날의 지도와 자료 그리고 현재의 지도를 동원해 황성신문사 ‘종로 사옥’의 정확한 위치를 추정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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