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3)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 경복궁 문지기에서 단숨에 재상까지 (3)
경복궁 문지기에서 겸사복(왕의 경호 군사)으로 발탁되다
1467년 세조 13년 6월 15일 실록의 기록이다.
임금은 경연을 마무리할 즈음에 어제 상소를 올린 갑사를 들라고 명했다.
세조는 입시한 유자광에게 상소에서 말한 이시애를 토벌할 책략을 직접 말해보라고 했다.
유자광은 상소에 쓴 내용을 거침없이 아뢰자, 세조는 경연에 참여한 신하들을 보며 말했다.
"이자가 과인의 뜻에 합하는 말을 해주었다.”
유자광은 세조의 칭찬에 감읍하여 말했다.
"만약 신에게 날랜 군사 3백을 주시면, 이시애의 목을 베어서 대궐 아래에 대령할 수 있겠습니다."
세조는 유자광에게 술을 내려 격려하였다.
다음날인 6월 16일의 실록에 의하면, 세조는 문무백관들과 함께 조회를 하는 자리에서 역적 이시애가 북방을 도둑질하여 웅거하고 있는 상황을 논의하였다.
세조는 갑사 유자광을 불러 문무백관이 모두 보는 자리에서 이시애를 토벌할 대책을 다시 말하게 하였다.
유자광은 임금의 명을 받고 입시한 신하 모두가 잘 들리게 우렁찬 목소리로 대략 상소문과 같은 내용을 말했다. 그리고는 말을 더했다.
"장수들이 진격하지 않고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옳지 못하나, 군대의 일은 먼 곳에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이곳의 판단으로 전장의 장수들을 지휘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세조는 유자광이 조정의 신하들이 다 모인 조회 자리인데도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주장을 펼치는 것을 보고 흡족해했다. 세조는 즉석에서 유자광을 겸사복(兼司僕)으로 임명하였다.
겸사복은 왕을 최측근에서 지키는 경호 군사였다. 겸사복은 왕의 경호 외에도 말을 부리는 재주가 있고 마상무예에 뛰어난 사람들을 주로 뽑았기에 전투력이 뛰어나 조선시대 여러 전투에서 큰 활약을 통해 승진의 기회가 많았기에 초급 무인들에게 선망의 자리였다.
6월 28일의 실록에 의하면, 신숙주, 구치관 등과 겸사복 유자광 등을 불러 이시애 잡을 책략을 의논했다.
임금은 신숙주에게 명하여 도총사 이준에게 의논한 결과를 보내는 서찰을 즉시 쓰게 하였다.
또 유자광에게도 초안을 쓰게 하여 그 재주를 시험하였다.
유자광이 붓을 놓자 세조가 신숙주더러 읽어보라고 하였다. 신숙주는 유자광의 글을 읽어본 후, 임금에게 아뢰었다.
"격식에 맞게 문장만 조금 다듬으면 그대로 이준에게 보내도 될 것 같습니다.”
임금이 유자광을 가상히 여기고 술을 내리고는, 엎드려있는 유자광에 다가가서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의 태종은 호걸(豪傑)한 선비를 대함에 반드시 먼저 위엄으로 그 기상을 꺾은 연후에야 맡겨서 등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과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친애(親愛)할 따름이다. 너를 장수로 삼아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이시애를 토벌하게 하려 하나, 너는 미천하니 사졸(士卒)이 업신여겨 따르지 않을까 염려되어 그렇게 하지 못한다. 너는 그리 알도록 하라.”
세조 13년 6월 30일.
실록에 의하면, 세조는 유자광이 얼마나 날쌔고 용맹한 지 그 재주를 시험해 보았다.
유자광은 세조의 명을 받고, 높은 돌층계를 한 번에 뛰어넘고, 궁궐 뜰의 큰 나무를 잡고서 오르기를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는 것 같이 타고 올랐다.
임금이 감탄하며 주위에 있는 겸사복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너희들도 유자광과 같이 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재주를 한번 보여 보아라.”
임금의 말을 듣고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세조 13년 7월 2일.
세조는 유자광을 전선에 보내 도총사 이준에게 보내는 서찰을 자신의 당부와 함께 직접 전하게 하였다.
세조는 서찰에서 총통군의 공격으로 적진을 혼란하게 만들고, 이 틈을 타서 총공격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진(陣)을 격파하는 데는 총통이 최고이니, 총통의 공격으로 적진이 혼란해지면 군사들은 급히 이때를 틈타라. 이것이 진을 함몰하는 계책이다. 그러나 군사의 일은 멀리서 지시하기 어려우니, 그대가 잘 헤아려라. 과인도 또한 서울을 출발하여 그대를 뒷받침하겠노라."
총통군은 화약을 이용하여 화살을 쏘는 화기 방사군으로 세종 때 4군 6진을 개척하면서 여진 정벌을 위해 총통을 발사하는 임무를 목적으로 설치된 특수 병제였다. 총통 한 개당 화살 10개를 한꺼번에 쏠 수 있어 주로 적진을 격파하는 임무를 맡았다.
7월 13일, 유자광은 전선의 상황을 궁금해할 임금을 위해 지친 말을 바꿔가며 한양의 대궐을 향해 남쪽으로 달렸다. 유자광은 도성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궁궐에 들어가 세조에게 보고를 드렸다.
"강순이 포로로 잡은 함길도 군졸에게 적의 형편을 캐어물었습니다. 그 자가 말하기를, ‘이시애가 군사를 더 뽑아 와서 적의 형세가 매우 강해졌다’고 하였습니다. 이준이 이르기를, ‘조정에서는 적의 형세가 이미 쪼그라들었다고 이야기한다는데, 이것은 글만 앞세우는 자들이 적을 쉽게 여겨서 그런 것이다. 지금은 군사의 형세가 매우 어려우니, 그대가 그것을 자세히 아뢰라.’고 했습니다.”
유자광은 세조의 최측근 경호 군사인 겸사복으로 근무하면서 점점 더 임금의 신임을 얻어 궁궐과 전선을 연락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다음 편에 계속)
'옛(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와 현실] 서울의 열 가지 풍경 (0) | 2022.07.27 |
---|---|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4) (0) | 2022.07.27 |
남한산성 탐방 (0) | 2022.07.25 |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2) (0) | 2022.07.25 |
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1) (0) | 2022.07.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