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36] 노인에게 버스 좌석 양보 않으면 단속… 대통령이 "자리 양보 풍습 확대" 강조
1973년 시내버스로 출퇴근하던 70세의 의사 김모씨는 매일 수첩에 특별한 기록을 해 나갔다. 그날 버스에서 좌석을 양보받았는지, 양보받았다면 어떤 연령·계층의 승객이 호의를 베풀었는지를 꼼꼼히 적었다. 9개월간 조사한 결과, 962차례나 버스를 타는 동안 양보를 받은 횟수는 320회였다. 세 번에 한 번꼴밖에 안 됐다. 양보를 제일 잘 해주는 사람은 26~30세의 남자였고 노인을 가장 못 본 체하는 건 여중생들이었다. 자리를 내준 사람 중엔 점퍼 차림의 시민(65.8%)이 대다수였고 양복쟁이(31.1%)는 적었다. 특히 김씨는 이 조사를 통해 '연애하는 젊은 남녀'는 노인이 앞에 서 있어도 절대로 일어서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칠순 노인의 조사는 노인에 대한 좌석 양보에 인색한 세태에 일침을 놓으려는 뜻이었다.
시내버스가 시민의 발이 되어가던 1950년대부터 노약자를 못 본 체하며 앉아 있는 젊은이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신문에 자주 등장한다. 어떤 시민은 "노인이 서 있는데도 피둥피둥한 학생들이 버젓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증오감이 생긴다"는 표현까지 썼다. 1960~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버스 좌석 양보는 젊은이의 의무였다. 차 안엔 '노인과 어린이에게 자리를 양보합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고, 안내양은 이런 내용을 승객에게 열심히 외쳤다. 최고권력자까지 이 문제를 거론했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은 시내버스에 탄 할머니와 장애 학생에 대한 자리 양보 미담을 '외국인도 부러워하는 경로사상'의 사례로 소개하며 "앞으로 이런 좋은 면은 크게 확대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심지어 1967년 2월엔 경찰이 '자리 양보 안 하는 행위'를 8대 비도덕적 행위의 하나로 규정해 벌금을 부과하겠다며 단속을 벌이기도 했다(조선일보 1967년 2월 1일 자).
반세기 전, 대중교통 좌석 양보는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측면보다는 유교의 '장유유서(長幼有序)' 윤리에 따른 어른 공경 행위라는 데에 무게가 실렸다. 서 있는 노인을 보고도 딴전 피우는 학생에게 옆의 아저씨가 "학생! 자리 좀 양보해 드려" 하고 훈계하는 일도 흔했다. 하지만 그 시절 상당수 젊은이도 '나이순으로 앉기'라는 질서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공부에 지쳐 핼쑥해진 중학생과 건장한 중년 아저씨 중 누가 앉아야 하느냐'는 식의 문제 제기가 반세기 전 신문에 이미 보인다.
오랜 세월 세상은 엄청나게 바뀌었지만 대중교통 좌석 신경전은 여전하다. 좌석 우선권을 둘러싼 노인·젊은이 간 견해차는 더 벌어진 느낌이다. 예전 학생들이 버스에서 앉아 가다 노인이 타면 조는 척이라도 했던 건 '양보 안 하는 게 잘못'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지하철 자리에 앉아 코앞에 서 있는 백발노인을 빤히 바라보는 학생도 있다. 일부 청년은 "나도 돈 내고 탔으니 앉을 권리 있다" "양보를 하고 안 하고는 내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장유유서 윤리의 퇴조와 함께 '약자 보호' 의식까지 덩달아 실종돼 가는 듯해 씁쓸하다. 캠페인 따위로는 해결될 수 없는 지경에 왔다. 지난달 당국 발표에 따르면 서울시 교통 인구 중 고령자, 장애인, 임신부 등 교통 약자가 227만명으로 교통 인구 4명 중 1명꼴이라고 한다. 현실에 맞춰 교통 약자 좌석을 확충하는 등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 외엔 뾰족한 방안이 없어 보인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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