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벼락 출세자, 유자광
난세에 기회를 얻다 (10)
유자광은 갑사에서 3개월만에 무신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정랑이 되었다
박안성은 사간원의 대표로 임금에게 아뢰었다가, 쫓겨 나오듯 물러나게 되어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정승인 아버지의 후광과 임금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던 기세가 단번에 꺾인 기분이었다.
‘주상 앞에서 제대로 다 말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못한 말을 글로서라도 아뢰어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박안성은 동방 급제한 김종직이 주상을 거스르며 반대하다가 파직을 당한 일이 생각났다. 임금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표현에 신경을 쓰면서 초안을 여러 번 고쳐 썼다.
박안성은 깨끗한 종이를 펼쳐 놓고 붓을 들었다.
"신(臣)들이 유자광이 병조정랑에 맞지 않다고 여러 번 아뢰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조정을 바로잡음으로써 백관을 바로잡고, 백관을 바로잡음으로써 만백성을 바로잡는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사람이 중요하지 관직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결과적으로 관직도 조정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박안성은 붓을 놓고 글자가 마르기를 기다리다가 다시 붓을 들었다.
"전하께서 특별히 넓고 큰 도량과 미천한 자를 받아들이는 덕으로써 유자광의 재주를 살리려고 그를 허통 시켜 즉시 등용하시니, 이것은 진실로 매우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병조의 관리와 군사들이 천출인 유자광을 가벼이 여길 것인데, 어찌 공경하여 복종하겠습니까. 사람을 가벼이 여기면 병조도 가벼워질 것이고, 병조가 가벼워지면 조정도 가벼워질 것입니다. 조정이 가벼워지는 것은 국가에 좋은 일이 아닙니다. 헤아리시어, 바로잡아 주시옵소서!”
도승지가 박안성이 올린 상소를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승지에게 말했다.
"박 사간의 글은 하나하나 옳은 말이오. 주상께 바로 올려드리게.”
승지가 편전에 입시하여 박안성의 상소를 받들어 올렸다.
"사간원 사간 박안성의 상소이옵니다.”
임금은 상소를 받지도 않고 승지에게 말했다.
"이것은 분명 유자광에게 관한 글일 것이다. 어제 박 사간이 입시하여 말하였으니 무슨 내용인지 알만하다.”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들은 박안성의 상소를 임금이 아예 읽어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는 소식에 서로 모여 웅성거렸다.
"대사헌과 대사간은 아랫사람들만 어전에 들여보내고 임금이 무서워서 뒷짐만 지고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대사헌 양성지는 관원들의 불만 섞인 눈초리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대사간을 찾았다.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때가 된 것 같소.”
대사간 김지경은 내키지 않았으나 양성지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주상전하의 고집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정효항과 박안성을 심히 나무라서 쫓아내고, 이후 박안성이 올린 상소를 읽어보지도 않고 물리쳤습니다. 우리가 나서려면 직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양성지도 세조의 성정(性情)을 잘 알지만 후배들의 압력과 조정의 공론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김지경이 양성지의 생각을 읽고 제안을 했다.
"주상이 강경하게 고집을 하니 입시하여 뵙고 아뢰기보다는 두 사람의 이름으로 상소를 올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성지가 김지경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소. 일단 상소를 올리고, 성상(聖上)께 말씀드리는 것은 따로 기회를 가집시다.”
김지경이 물었다.
"영공께서 상소의 초안을 잡으시겠습니까?”
"아니오, 대사간께서 제안을 했으니, 먼저 초안을 잡아서 내게 보여주시오.”
김지경은 양성지의 반응이 예상되었던 터라, 그의 말에 순순히 응했다.
"그러면 제가 먼저 상소의 초안을 잡아보겠습니다.”
김지경은 사간원에 돌아와서 삼삼오오 모여서 웅성거리는 관원들을 보고 소리쳤다.
“그렇게 모여 있지만 말고, 주상을 제대로 설득할 수 있게 사례를 모아보게나. 서얼의 자손이어서 벼슬을 허용하지 않은 사례나, 허통 하였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주요한 직책에 오르지 못하게 한 사례들을 찾아 나에게 넘겨주게.”
김지경은 사간원 관리들이 찾은 사례를 살펴보고, 붓을 들어 상소의 초안을 쓰기 시작하였다.
"옛날부터 사람을 쓸 때 오로지 재주만을 보지 않고 출신도 참고하였습니다. 인재를 천거할 때에 이르기를, 안팎으로 허물이 없다고 하는 것은, 미천한 출신이 다 쓸 만한 재주가 없다는 까닭이 아니라, 상하와 존비를 밝히고 귀천을 구별하려는 까닭입니다.”
김지경은 여기까지 쓰고 사간원 관리들이 써 준 사례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붓을 들었다.
"만약 이미 허통 하였으니 무엇이 불가(不可)하겠는가고 하신다면 신들도 할 말이 있습니다. 세종대왕 시절에 조득인은 뇌물 받은 관리의 손자이지만 허통하여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오르게 허락하였으나 성균관의 유생을 훈육하는 교관인 학록(學錄)으로 옮길 때, 임명을 미루었습니다. 최근에 한승경이 화순 현감에 제수되었을 때, 공신 하륜의 첩의 손녀사위이므로 수령에 마땅치 않다고 사헌부에서 아뢰어, 전하께서 곧 파직을 명하였으니 실로 유자광의 사례와 같습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성균관의 학록과 지방의 수령은 병조의 낭관보다 직책이 가벼워도, 허통한 조득인이 학록이 되지 못하였고, 첩의 손녀사위인 한승경이 수령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하물며 유자광은 첩의 아들이니 비록 허통 하였더라도 어찌 그를 병조의 정랑으로 삼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하루빨리 내리신 명령을 거두시어, 조정을 높이시고 나라의 법을 공고하게 하소서.”
양성지는 김지경이 가져온 상소의 초안을 읽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뜻에 부합되오. 연명하여 주상께 올리도록 합시다.”
두 사람의 이름으로 쓴 상소문은 승정원을 통해 임금에게 전해졌다.
세조는 승지가 전해준 대사헌과 대사간이 함께 올린 상소를 읽어보고는 생각에 잠겼다. 유자광의 재주를 알아보고 병조정랑으로 발탁하려는데, 전례에 없는 일이라고 양사(兩司)가 힘을 합해 며칠을 계속하여 반대하는 것이 답답하였다. 세조는 세종대왕 때의 장영실을 생각했다. 장영실은 동래현의 노비였으나 세종대왕이 그의 재능을 귀하게 여겨 면천을 시키고 벼슬을 허락하였다. 장영실은 정 3품까지 벼슬을 하며, 수많은 천문관측기구를 만들어 나라에 공을 세웠다.
‘세종대왕께서도 장영실의 벼슬을 올릴 때마다 천출이라는 이유로 대간들의 반대를 받았다. 나라가 인재를 쓰는데 어찌 신분의 귀천만을 따지겠는가.’
세조는 상념에서 깨어나 승지에게 말했다.
"대사헌과 대사간을 들게 하라.”
양성지와 김지경은 임금이 두 사람을 입시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말에 마음을 졸이며 어전으로 달려와 엎드렸다. 세조는 짐짓 아무 일도 모른다는 듯이 엎드린 두 사람에게 물었다.
"경들이 온 것은 무슨 일인가?”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양성지가 작은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유자광이 얼자로서 병조의 낭관에 임명되었으나, 신들이 다른 직책에 임명하도록 감히 청하였습니다.”
세조는 양성지가 나라를 위한 계책을 자주 올려, ‘해동(海東)의 제갈량’이라고 부르며 신임하고 있었다.
김지경도 양성지의 말을 거들었다.
"세종 때에 조득인이 장리(贓吏, 부패한 관리)의 후손으로서 성균관 교수에 임명되니, 그때 대간들이 임명을 취소하자고 청하여 세종께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또 지난해 봄에 하륜의 첩의 손녀사위가 화순 현감에 임명되니, 신들이 고치자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병조정랑에 어찌 얼자를 앉히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고얀 놈들! 세종대왕의 일까지 끄집어내어 과인을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하다니......’
세조는 언짢은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경들이 세종의 고사(故事)를 들어서 말하는데, 이것은 세종 때의 일을 가지고 과인을 곤혹하게 하려는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어진 이를 세우는 데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고, 다만 사람을 얻는 것만을 귀하게 여길뿐인데, 어찌 귀천을 논하겠는가?”
양성지와 김지경은 임금의 단호한 말에 할 말을 잊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지경이 다시 나서서 아뢰었다.
"하지만, 전하......”
세조는 김지경의 말을 자르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인은 유자광을 어질다고 하여 벼슬길에 허통 시켰는데, 그때는 경들 가운데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다가 지금 병조정랑에 임명하니, 불가(不可)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경들의 마음에는 다른 관직에는 허통할 수 있어도 오로지 병조의 낭관만은 안 된다는 것인가. 이미 허통 한다고 하였으면 무슨 관직인들 허통하지 못하겠는가? 유자광을 허통한 것은 임금의 특별한 은혜인데, 과인의 특별한 은혜를 너희가 감히 저지하겠다는 말인가?”
임금이 '경들'이라 하지 않고 ‘너희’라고 호칭하며 차갑게 나무라니, 양성지와 김지경은 등골이 서늘하였다.
세조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꺼내게 못을 박았다.
"친구와 사귀되 너무 자주 잘못하였다고 친구에게 간하면 멀어지듯이, 임금을 섬기되 너무 자주 군주의 결정을 바꾸라고 임금에게 간하면 욕이 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다시 말하면 반드시 죄를 물을 것이다!”
두 대신은 몸을 바짝 웅크리며 몸 둘 바를 몰랐다.
세조는 비로소 노한 안색을 풀었다.
"경들은 이번 건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지 말고, 술을 내릴 터이니 마시고 물러가는 것이 옳다.”
임금은 양성지와 김지경에게 술을 내려주어 마시게 하였다.
세조는 두 사람과 함께 사헌부와 사간원의 주요 관리들을 모두 불러 술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임금은 술을 마시는 양사의 관리들을 격려하였다.
"모름지기 고집불통이 필요하니, 만약 고집스럽게 주장하지 않으면 일이 모두 해이해질 것이다. 너희들이 굳게 의견을 말하니, 매우 가상히 여긴다. 대간의 말을 무겁게 여기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라의 인재를 쓰는 일도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조는 며칠 동안 계속된 저항과 반대를 무릅쓰고 서얼 출신 유자광을 병조의 정랑에 임명할 수가 있었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하급 무관인 갑사에서 반년도 안 되어 무신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병조정랑이 된 것이었다. 이때 유자광의 나이는 29세였다.
유자광은 태종이 서얼 차별법을 만든 이후, 서얼 출신으로 인사를 담당하는 전조(銓曹)의 낭관에 임명된 첫 사례이자, 마지막 사례가 되었다.
서얼 차별은 조선 이전의 역사에도, 중국의 역사에도 찾기 어려운 조선 초기에 생긴 독특한 제도였다. 서얼 차별은 태종 때 법으로 명문화된 이후 첩의 자식인 서얼은 법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서얼은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물론, 가문을 잇는 것도 금지하여 자신의 아들 중에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으면 양자를 들여 가문을 잇게 하였다. 한번 서얼이면 자손들도 서얼이 되므로 서얼의 수는 점차 늘어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조선의 반이 서얼’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사회문제가 되었다. 조선에서 서얼 차별 철폐를 위한 움직임은 언제나 실패하였고, 조선이 망하기 직전인 1894년 갑오개혁 때 비로소 실현되었다. 이것은 조선이 더 풍부한 인재를 활용하는데 걸림돌이 되어 국력을 쇠퇴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감성에세이와 역사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연예인 '만담왕' 신불출 스토리를 발굴하였고,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야기인 '선비의 나라'를 집필중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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