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ace 5. 왕의 몸은 역사에게 솔직하다 1
전장을 누빈 장수, 태조(제 1대왕 1335~1408)
bep 15. 2022
조선 창업 군주 태조 이성계는 평생토록 전장을 누비던 고려의 무인(武人)이고 장수였습니다. 따라서, 일상이 근면한 수련과 기본 체력에 용맹한 기세가 그의 건강을 지탱하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각종 법전을 편찬하고 숭유억불(崇儒抑佛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는)정책 등을 펼치며 조선의 근간을 마련했지만, 몸도 마음도 편치많은 않았습니다.
30여년을 전쟁터를 누비다가 구중 궁궐에 갇혀지내니,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에 속 열이 생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록에 태조는 “속 열이오르고 매양 목이 마를 적에는 포도 한 두 개를 먹어가며 병세를 회복했다.”고 전합니다.
갈증이 나는 사람은 포도와 같이 진액을 보충해주어라고 내의원은 진단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조 7년에 “한간이 수정포도를 바치다. 왕의 병이 이로부터 회복되다.”고도 기록합니다.
태조가 먹었던 수정포도는 “성질이 따뜻하여 맛을 달고 시고 독성이 없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식들이 벌이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권력다툼으로 그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는데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결국 평안한 노후를 보내지는 못했습니다.
이성계에게 아들 이방원은 과거에 장원급제한 전주 이씨 가문의 빛이고 자부심이었지만, 불화를 겪으면서 그는 마음의 화(火)를 참지못하여 홧병과 지병 풍질(風疾)을 깊어져 가는데요.
자신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사랑하는 두 아들과 사위 이제, 친구이자 신하였던 정도전까지 죽인 이방원을 증오해서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야사가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정종 이방과가 왕위를 태종 이방원에게 양위하자 용서를 못하고, 자신이 세운 왕조를 향해 스스로 반란 ‘조사의의 난’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성계에겐 최초이자 유일한 실패로 돌아갔고, 태종에겐 왕좌의 정통성을 위해 결국 무학대사의 청으로 도성 개경으로 끌려오다시피 합니다.
<실록>에 의하면, 이 때가 음력8월 깊어가는 가을로 심한 폭우와 우박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60대 후반의 이성계에게는 심신이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았기에 그가 병에 안 걸리는 것은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한양천도’를 계기로 태종 이방원과 관계를 회복하지만, 당시 개경민심이 좋지 않아졌고 왕자의 난 등으로 이성계를 조롱하기까지 하여 ‘성계육’, ‘조랭이 떡국’등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결국, 태조는 자신이 사랑했던 신덕왕후 강씨의 능묘가 있던 한양에 돌아온 후, 절이나 온천을 유람하며 보내다가, 풍질(風疾 뇌졸중)로 74세에 승하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악연 속에서도 아이러니하게 이성계의 마지막을 지킨이는 태종 이방원이었다고 합니다. <실록>에는 “눈을 들어 왕을 다시 쳐다보더니 이에 승하했다.”고 그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글빚는 한의사 알리고출간작가
<알.쓸.신.기.동의보감>,<치매백문백답>,<알파고 동의보감>,<뇌건강을살리는계절음식>등의 몇몇 책들을 국내외에출간하였습니다.한의사,칼럼니스트,강사,콘텐츠개발자로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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