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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조선 최대의 뇌물사건(1)

by 까망잉크 2022. 9. 21.

조선 최대의 뇌물사건(1)

성종 7년, 백여 명의 관리가 연루된 조선 최대의 뇌물 사건이 터졌다

by두류산Sep 01. 2022

 백 명이 넘는 조정 관리가 뇌물사건에 연루되었다

 1476년 성종 7년, 조선 최대의 뇌물 사건이 터졌다. 지방의 수령이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인 재물로 조정의 대신들과 백 명이 넘는 주요 관리들에게 광범위하게 뇌물을 주어 거의 모든 조정의 신하들이 부정한 재물을 수뢰한 사건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화폐의 유통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으로 뇌물을 주고받았을까? 이 시대의 뇌물은 보통 귀금속이나 포목, 그리고 지역 특산품인 호피(虎皮), 들깨, 미역, 인삼 등이었다. 벼슬을 얻고자 하거나, 재판의 결과를 뒤집기 위해 토지와 노비를 권세가에 뇌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사헌부는 칠원(漆原, 지금의 경남 함안지역) 현감 김주(金澍)의 비리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감찰을 보내 수사에 착수했다. 낌새를 알아챈 김주는 임지를 이탈하여 달아나버렸다.

성종 7년 9월, 임금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임금의 호통으로 어전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조선 개국 이래 최대의 뇌물 사건을 사헌부로부터 보고받는 자리는 분위기가 험악했다. 임금은 불끈 쥔 주먹으로 용상을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의금부에 명하여 도망 중에 있는 현감 김주를 체포하도록 하라. 현상금을 걸어서라도 기필코 붙잡아야 한다!” (성종실록, 재위 7년 9월 28일)

사헌부의 젊은 관리들은 김주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규탄했다.

 “김주는 오랫동안 한명회의 이웃에 살면서 한명회를 아버지처럼 섬겼다고 합니다. 그런 인연으로 한명회에게 청탁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품계를 뛰어넘어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가, 얼마 안 가서 자신이 바라는 칠원 현감이 되었으니, 한명회는 김주로부터 뇌물을 당연한 일처럼 받았을 것입니다.”

 “김주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자신을 과시하면서 한명회는 숙부이고 정승인 김정국과 김질은 집안 형제라고 자랑하고 다녔답니다.”

사관(史官)은 이 사건을 실록에 기록하면서 김주에 대해 논평했다.   

‘김주는 사람됨이 교활하고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공장(工匠,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들에게 사사로이 일을 시켰으며, 또 상인들과 결탁해서 백방으로 이익을 꾀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이 드러나기에 이르자 도망하였던 것이다.’ (성종실록, 재위 7년 9월 28일)

사관은 또한 중국 하(夏) 나라의 임금인 폭군 걸왕(桀王)에 빗대어 걸 태수(桀太守)라고 하며 포학한 지방수령이었던 김주를 춘추필법으로 비난하였다.  

 ‘김주는 스스로 잘난 체를 하며 사람됨이 경박하였다. 칠원 현감이 되어서는 백성들에게 착취를 일삼아 사람들이 그를 걸 태수라 하였다. 백성들에게 짜낸 재물을 밑천으로 권세 있는 조정의 고관들과 연결하여 불의한 짓을 많이 하였다.’ (성종실록, 재위 7년 11월 16일)

 한 달 보름이 지난 후 의금부가 김주를 체포하고, 임금에게 보고를 올렸다.  "칠원 현감 김주와 이 일에 간여된 사람은 지금 이미 사면령의 혜택을 입었으나, 김주가 자기 집으로 들여간 옷감 1백20 필은, 청컨대 관청에서 몰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또한 김주의 이름을 장안(贓案)에 기록하고, 뇌물을 받은 자를 모두 자수하게 하되, 자수하지 않는 자는 장리(贓吏)로 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종실록, 재위 7년 11월 16일)

 장안은 뇌물죄를 범한 관리들의 명단이었다. 장리는 뇌물을 받은 관리라는 뜻인데, 이름이 장안에 기록되는 것은 본인의 불명예는 물론 자손들도 과거 응시를 할 수가 없게 되고 관직 등용이 제한되어, 가문에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주는 큰 벌이었다.

임금이 보고를 받고 물었다.  

 "뇌물을 받은 사람은 이미 사면령의 혜택을 입었으니, 묻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김주도 사면 대상인데, 장안(贓案)에 기록해야 하겠는가?”

 시기가 묘하게도 훗날 연산군이 되는 원자가 태어난 기쁨을 백성들과 나누기 위해 대사면(大赦免)을 공포한 직후였다. 조선시대 대사면은 형의 언도를 받은 자는 물론 형의 언도를 받지 않은 자에 대해서도 효력이 발생했다. 또한 형의 집행으로 인하여 상실 또는 정지된 자격도 회복되었다.

입시한 승지들이 아뢰었다.

 "이미 대사령(大赦令)이 내렸으니 물품을 받은 자는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있지만, 뇌물죄를 범한 사람은 비록 사면의 대상이 된다고 하더라도 장안(贓案)에 기록한 일이 전례(前例)에 있으니, 김주를 장안에 기록함이 마땅합니다.”

 성종은 이미 사면령을 내렸는데 죄를 다시 묻는 것은 법의 신뢰를 깨트리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임금은 정승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정승들도 김주를 장안에 등재함이 마땅하다고 아뢰었다. 성종은 정승들의 의견을 듣고 명했다.

  "그렇다면, 김주를 장안에 기록하고 장물은 모두 몰수하라. 하지만 이미 사면령을 내렸으니 나머지 연루자는 논하지 말라.” (성종실록, 재위 7년 11월 16일)

사헌부 관리들은 뇌물을 받은 죄를 지은 몰염치한 관리들이 모두 사면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에 불만을 가졌다.  

 "김주가 자기 물건을 가지고 뇌물을 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낸 것이니 김주만 아니라 김주에게 뇌물을 받은 조정의 대신들도 장안(贓案)에 기록해야 마땅한 일일 것이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뇌물을 받은 자들은 재물을 탐하는 것이 김주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면을 받아서 장안에 기록을 못한다면, 최소한 누가 받았는지 이름을 밝히고, 받은 물건도 모두 몰수하여 염치가 무엇인지 널리 알려야 합니다.”

사헌부 관리들은 대사헌 윤계겸과 이 문제를 의논했다. 대사헌 윤계겸은 경연장에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김주에게 물건을 받은 자는 거론하지도 몰수하지도 말라고 명하셨는데, 이것은 매우 온당치 않사옵니다.”

 임금이 대사헌에게 물었다.  

 "사면령이 내렸고 물건이 많지 않은데도, 일일이 밝혀 다시 거두어들인다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법의 신뢰를 잃지 않겠는가?”

사간원의 간원이 대사헌을 거들었다.

 "김주가 자신의 소유물을 남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백성의 고혈을 짜낸 것입니다. 모두 몰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은 정승들에게 물었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윤사흔이 나서서 아뢰었다.

 "대간의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받은 것들이 많지는 않을 것인데 일일이 확인하여 몰수함은 번거로움이 따를 것입니다.”

사간원의 간원이 다시 나서서 아뢰었다.

 "재상이 비록 요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김주가 보낸 물건을 받았으면 마땅히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받고서 돌려보내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음식물 같으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포목이라면 몰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받은 자 중에는 재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상이 김주에게 요구하여 받은 것이 아닌데 이를 밝혀 거두어들인다면, 재상이 오명(汚名)을 얻지 않겠는가.” (성종실록, 재위 7년 11월 22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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