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한강 1
한강인도교
2022년 현재 한강에는 총 32개의 다리가 있다. 한강 위에 최초로 다리가 놓인 것은 1795년이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에 있는 아버지 묘소를 다녀오기 위해 한강 위에 다리를 만들었다.
정조의 아버지는 사도세자다.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죽은 비운의 왕자다.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조선 궁궐의 온갖 비극 요소가 버무려져 있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홍봉한의 딸이다. 정조와는 대척점에 서 있던 노론 벽파의 중심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앞장섰다. 외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 셈이다. 다리는 얽히고설킨 복잡한 인연들을 이은 채 한강을 가로 질러 놓여졌다. 다리를 건너는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마음은 어땠을까.
230년 전 어떻게 한강 위로 다리를 만들었을까. 참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다리는 모두 288척의 배를 연결한 주교(舟橋)였다. 흔히 배다리라 부른다. 고려시대 이미 배다리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주교는 배만 연결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이어주었다.
정조의 배다리로부터 105년 후인 1900년 한강에 현대식 다리가 놓여졌다. 첫 번째 한강 다리는 열차의 이송을 위한 철교였다. 사람이 걸어서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된 것은 1917년부터다.
한강인도교는 강북 노량진과 강남 동작을 연결시켰다. 100여 년 전 배다리가 놓인 바로 그 지점이었다. 1950년 6.25 발발 3일 만에 다리는 졸지에 비극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군대가 다리를 폭파시켰다. 인민군 탱크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다리위에 있던 50대의 차량이 강물에 빠지고 70여명의 경찰이 죽었다. 이후 한강인도교는 흉물스런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다가 1958년 5월 복구됐다. 1984년엔 한강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복구된 지 3년 후 한강인도교 위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만들어졌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반이었다.
한강인도교 중간에서 진기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밤이 되면 이곳은 늘 육군 헌병들에 의해 철통같이 지켜졌다. 그 시각 해병대 병력의 호위를 받던 한 장군이 다리 위에서 육군 헌병들과 대치중이었다.
장군의 얼굴은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평소 그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던 표정이었다. 그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병력을 이끌고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반란군의 수괴로 처형될 판이었다.
다리 위의 헌병들이 그런 정황을 알 리 없었다. 그들은 명령에 의해 누구도 다리를 통과할 수 없게끔 그곳을 지켜야만 했다. 장군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는 증언도 있다. 하지만 확실치 않다. 그가 원래 호주가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의 인생에는 두 개의 드라마틱한 한강이 있었다. 첫 번째 한강은 11년 전 한국전쟁 당시였다. 1950년 6월 하순 그는 한강 북쪽에서 남으로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그는 강둑에 서서 잠시 망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그의 신분은 남한의 군무원이었다. 북이 남쪽을 점령하려고 전쟁을 일으켰으니 그는 당연히 남으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남쪽으로 간들 그를 반겨줄 사람은 없었다. 북쪽도 마찬가지였다. 남과 북 어디에도 그가 설 땅은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남이냐, 북이냐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대로 안개처럼 사라질 순 없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육군 본부는 이미 시흥으로 내려갔다고 들었다. 그곳으로 가면 그를 반겨줄까. 그는 한 때 남로당에 몸을 담았다. 그로인해 군복을 벗어야만 했다. 북이 전쟁을 일으켰는데 남쪽의 육군 본부는 이전처럼 그를 받아줄까.
북쪽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때 북의 이념을 추종하겠다고 서약했지만 북의 시선에서 볼 때 그는 동지들을 판 밀고자였다. 그들이 자신을 받아줄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더구나 북의 이념을 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그가 어렵게 배를 구해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5.16 군사정변은 없었을 것이다. 한강 앞에 선 그는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가슴을 졸였다. 긴장감은 오히려 더했다. 그는 반역을 꿈꿔 왔다. 그는 다리를 건너 화려한 권력의 중심부로 가려 했다. 그곳엔 그가 늘 꿈꿔오던 세상이 있었다.
당시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혼란은 그를 비롯한 군인들에게 기회와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헌병들은 그와 병력을 막아섰다. 그들은 오직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던 그는 군의 명령과 위계를 무너뜨려야만 했다. 이 순간 그는 어쩌면 루비콘 강 앞에서 카이사르가 한 말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이 강을 건너지 못하면 나는 파멸한다.
한강 다리를 통과하지 못하면 풍전등화 같았던 그의 인생과 그를 따르던 3600여 병력 수뇌부의 목숨은 위태로워진다. 그의 선택은 곧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됐다. 그는 마침내 한강을 건넜다. 이 후 한국 현대사는 산업화와 민주화 두 세력으로 나누어져 치열한 공방을 벌여 나갔다.
1961년 5월 16일, 그날 한강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16인 하극상 사건
5.16 군사정변을 이해하기 위해선 ‘16인 하극상 사건’과 그것의 모델이 된 ‘쇼와유신’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5.16의 사전 예고나 다름없는 ‘16인 하극상 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5.16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부대장들은 육사 5기와 8기생이었다. 그중에도 8기생에는 거사 설계자 김종필을 비롯해 6군단 포병 대대장 신윤창 중령, 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 6관구 작전참모 박원빈 중령 등 실 병력을 움직인 핵심 장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그보다 1년 전 이미 한 차례 일을 저질렀다. 육사 8기들은 1960년 대 초 5,6년 째 중령 계급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군내 인사정체는 심각할 정도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20대 후반 별을 단 선배들을 생각하면 분통터질 노릇이었다. 4.19 혁명 직후여서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던 시국도 한 몫을 했다.
육사 8기 가운데 김종필(전 국무총리), 김형욱(전 중앙정보부장), 길재호(전 장관) 등 8명이 1960년 5월 8일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군대 내 부조리를 없애달라는 내용의 연판장을 제출했다. 나중에 오치성(전 장관) 등이 새로 합류해 총 16명으로 늘어났다. 16인 하극상 사건으로 불리는 이유다.
육사 8기와 7,9기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그들 가운데 김종필은 박정희 소장과 인척관계였다. 박정희는 김종필의 처삼촌이다. 나중에 대한민국 역사를 바꾸어 놓은 두 사람의 만남은 육사 졸업 후 김종필의 첫 근무지였던 육군본부에서 이루어졌다.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김종필은 육군본부에 배속됐다. 당시 박정희는 그곳 문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소령시절 남로당 입당 전력이 드러나 파면당한 후 문관으로 정보국 상황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 문관이지 실제는 반 실업상태였다.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형 박상희의 큰 딸을 소개했다. 공산주의자였던 박상희는 박정희의 셋째 형으로 1946년 대구 10.1 사건 당시 경찰에 의해 사살 당했다. 박정희는 형제 가운데 셋째 형 박상희를 유난히 따랐다.
박정희는 박상희의 친구 황태성의 보증으로 남로당에 가입했다. 북으로 간 황태성은 나중에 김일성의 밀사로 군사정변에 성공한 박정희를 만나러 남쪽으로 내려 왔다. 남로당원 박정희는 1948년 11월 여순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러나 백선엽, 장도영 등 선배 장군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풀려났다.
그 과정에서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당국에 넘겨주며 협조했다. 그로 인해 군복을 벗었던 박정희는 한국전쟁 발발 후 극적으로 현역 소령에 복귀했다. 김종필 역시 한 때 남로당에 발을 들여 논 적 있었다.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20대에 공산주의에 빠져 본 적 없고, 30대에 여전히 공산주의로 남아 있으면 둘 두 문제다”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20대에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비지성적이고, 30대 공산주의자는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소위 16인 하극상 사건으로 박정희와 김종필은 위기를 맞았다. 배후 인물로 지목된 박정희는 육본 작전참모부장 자리를 내놓았고, 김종필은 군문을 떠나야 했다.
박정희는 한국전쟁 통에 복직한 후 종전하던 해인 1953년 11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하지만 16인 하극상사건으로 박정희는 또 한 번 군복을 벗을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박정희는 2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옮겨 갔다. 2군 사령관이었던 장도영이 여순사건에 이어 또 한 번 박정희를 구해주었다. 장도영은 박정희보다 6년 아래였으나 군대에서 계급은 늘 한 발 앞섰다.
그와의 인연은 5.16까지 이어졌으나 끝내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16인 하극상 사건으로 박정희는 간신히 현역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언제 옷을 벗을지 모를 처지였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박정희는 1960년 1월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도지사, 부산시장, 경찰청장, 신문사 사장 등 지방 유력인사들 모임에서 뜻밖에 반가운 인물을 만났다. 대구사범학교 동창인 황용주였다. 당시 그는 부산일보 사장 겸 주필로 있었다.
박정희는 이후 황용주, 국제신문 주필로 있던 이병주와 셋이서 자주 어울려 다녔다. 이병주는 나중에 소설가로 필명을 얻었다. 대표작으론 ‘지리산’과 ‘관부연락선’ 5.16을 다룬 ‘그 해 5월’ 등이 있다.
이 셋은 스스로를 ‘산바가라스(三羽鳥·일본어로 삼총사라는 의미)’로 불렀다. 이병주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에도 박정희는 자주 쿠데타를 입에 올렸다고 한다. 4.19 혁명이 일어나자 “학생들에게 선수를 당했다”며 몹시 아쉬워했다고. 실제로 박정희는 4.19 이전부터 군부거사를 꿈꿔 왔다.
박정희는 자존감이 매우 강한 인물이다. 황용주를 만났던 부산 유력인사 모임에서 박정희는 일찍 자리를 떴다. 술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삼총사들에게 밝힌 이유는 “내 자리가 상석에 마련돼 있지 않아서”였다.
도지사와 시장에 비해 군수기지사령관의 자리는 한 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 무렵 박정희는 황용주와 이병주에게 일본의 쇼와유신(昭和維新)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은연중 자신의 야망에 대해 내비쳤다.
일본 근·현대사에는 두 차례 유신이 있었다. 메이지유신과 쇼와유신이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마땅히 혁명이라 불러야 했으나 일왕가의 단절로 해석될 것을 우려해 유신(維新)이라고 표현했다.
혁명은 기존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다는 의미다. 이에 반해 유신은 “개혁을 통해 천명을 새롭게 한다(其命維新)”는 뜻을 담고 있다. 유신의 어원은 ‘시경(時經)’에서 따왔다.
은(殷)을 멸망시킨 주 무왕은 은의 천명(天命)이 다했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반역을 정당화했다. 한 마디로 천명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은의 마지막 왕 걸(桀)은 달기라는 여인에게 빠져 주지육림(酒池肉林)을 헤매고 살았다.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달아 숲을 이루게 했다.
하늘은 덕이 많은 사람에게 천명을 내려 황제가 되게 한다. 걸의 폭정으로 은의 천명은 수명을 다했다. 하늘은 주 무왕으로 하여금 은을 무력으로 무너뜨리도록 허락했다. 천명은 그를 받은 인물의 행위 결과에 따라, 하늘의 뜻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박정희의 10월 유신은 이런 중국의 유신보다 쇼와유신을 더 닮았다. 일왕 체제를 유지한 채 개혁하겠다는 쇼와유신은 박정희 체제의 보존을 위한 10월 유신과 맥을 같이 했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일으켜 혁명(주체 세력들의 주장)과 유신 둘 다를 단행했다.
두 번의 유신 가운데 쇼와유신은 한국의 ‘16인 하극상 사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둘 다 젊은 장교들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일왕이 국정을 직접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소장파 장교들은 쇼와 11년(1936년) 2월 26일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부터 언론은 일본 내 러시아 10월 혁명 같은 조짐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왕 중심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지만 깊숙이 내부를 들여다보면 공산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공산주의에 빠져 있었다. 젊은 장교들의 행동은 일본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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