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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의 기록들

박정희와 한강 2

by 까망잉크 2022. 10. 28.

박정희와 한강 2

성일만Sep 24. 2022

혈서     

급진파 일본 청년 장교들은 총리 관저를 습격했다. 그들은 낡은 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기치를 전면에 내걸었다. 일본 근대 역사상 처음 있는 쿠데타였다. 하지만 역모는 실패로 돌아가고, 주동자들의 상당수는 처형을 당했다. 

청년 장교들은 공산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 당시 군부 내 나돈 유인물에는 공산주의적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사건 전 일본의 한 공산주의자는 국민의 모든 재산을 천황에게 반납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펼쳐 주목을 받았다. 

청년 장교들은 메이지이후 다이쇼(大正)를 거치면서 정치권의 부패, 재벌과 정치권의 결탁, 부의 불균형 등으로 일본이 국가적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신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쇼와유신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지만 남긴 후유증은 깊고 음울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군국주의는 더욱 강화되었고, 침략 야욕은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웃 나라들에게 전가되었다. 

이 사건 당시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졸업반이었다. 훗날 27살의 늦은 나이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로 장교가 된 박정희라는 청년의 머릿속에 쇼와유신은 전범(典範)으로 생생히 살아 있었다. 

 
 박정희는 1937년 4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교사직은 그의 야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는 군인이길 원했다. 그의 아버지(박성빈) 역시 구한말 하급군관 출신이었다. 박성빈은 군대 해산이후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박정희는 일본육사에 지원하고 싶었으나 나이제한에 걸렸다. 조금 덜 엄격한 만주군관학교(혹은 신경군관학교)에 지원했다. 학교 당국은 나이 문제를 들어 그의 입학을 불허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혈서를 써서 학교로 보냈다.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 충성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사익을 버리고 공익에 힘쓰겠다.)’ 

그가 쓴 혈서 내용이었다. 그 아래엔 목숨을 다해 충성하고,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도 들어있었다. 충성을 두 번이나 강조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한 마디로 내 한 목숨 기꺼이 나라에 바치겠다는 충정을 표시한 것이다. 여기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이 혈서는 만주의 신문에까지 개제됐다. 혈서를 써 보낸 정성 때문인지, 신문에 난 홍보효과 덕분인지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군관학교 2기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동기생으론 이한림(전 건설부장관)이 있고, 한 해 위 기수론 김동하(해병대 사단장), 이주일(전 감사원장) 등이 있다. 모두 5.16과 관련이 깊은 인물들이다. 이한림은 박정희의 일본 육사 동기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성적 우수자 특전에 따라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로 편입했다. 박정희는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했다.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에 따르면 박정희는 나중에 오카모도 미노루로 또 한 번 개명했다. 

박정희는 1944년 4월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7월 관동군 소속 육군 소위로 부임했다. 이후 8.15 광복에 이르기까지 일 년 여 그의 행적은 극심한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박정희는 한국현대사의 난제다. 공과 과가 너무 뚜렷하다. 어느 한 쪽을 취하고 다른 쪽을 버릴 순 없다. 대개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침으로서 극단적으로 공과 과를 논한다. 이 책에선 되도록 균형을 유지했다. 박정희는 유신이후 한 때 신격화되기도 했지만 10.26으로 급격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의 독립군 설(說)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독립군과 연계됐다는 설과 오히려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설이 충돌한다. 그에 관해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박정희의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한 작가가 독립군으로써 그의 활약을 그린 책을 출간하려 했다. 

청와대 비서진이 이를 박정희에게 전달하자 웃으며 “그만 두라”고 지시했다. 이를 두고도 해석이 분분하다. 사실이 아닌데 엉뚱한 내용의 책을 내자고 하니 웃음이 나왔다는 주장과 평소 내세우기 싫어하는 성격 탓이라는 각각 다른 의견이다. 

한편에선 그가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당시 일본군 장교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양 쪽 모두 뚜렷한 증거는 없다. 박정희 일대기를 쓴 조갑제의 결론은 간단하다. 

‘비밀독립군이었던 적도 없으며 독립투사를 잡아가둔 정보장교였던 적도 없다.’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권 146쪽.   

박정희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배경인 열하(熱河)성 일대 보병 제 8단에서 복무했다. 열하성은 1955년 요녕(遼寧)성으로 통합됐다. 심양, 대련 등의 대도시를 거느리고 있다. 

박정희 소위는 과묵한 편이었고, 일처리를 잘 했다고 알려졌다. 보병 8단 단장 부관으로 근무한 것을 보면 그의 업무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는 1945년 7월 1일 중위로 진급했다. 

이때 만해도 불과 한 달 보름 후 그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운명의 날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8월 6일 미군은 히로시마에 폭탄 한 발을 떨어뜨렸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위력을 지닌 원자폭탄이었다. 

단 한 방에 무려 26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틀 후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3일 후엔 나가사키에 또 원자폭탄 한 발이 터졌다. 소련의 스탈린은 극동군에게 일본군과의 전투 개시를 명했다. 

소련군은 극동군과의 전투서 승리했다. 일본에게 항복을 이끌어낸 원인으로 원자폭탄보다 극동군의 패배를 더 크게 여기는 군사전문가들도 있다. 아무튼 이 승리로 소련은 일본 분할 점령에 대한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한 얄타회담에서조차 거론되지 않았던 한반도가 분단된 것은 너무나 큰 비극이었다. 소련의 한반도 점령 의사를 눈치 챈 미국은 일본 대신 한반도를 나누기로 결정했다. 

소련은 8월 9일 함경도 경흥을 점령했다. 12일엔 나진까지 진격했다. 그럴수록 미군은 다급해졌다. 미 국방부는 소련에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둘로 나누자고 제안했다.  

일본은 10일 비밀리에 미국에 항복의사를 전달했다. 단장 부관이었던 박정희 중위는 일본의 패망 사실을 이 시기쯤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후 관동군은 중국군에 의해 무장 해제 당했다. 이후 8개월 여 동안 박정희의 행적은 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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