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한강 3
육사 8기생
그 기간 박정희가 무얼 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일본 패망 8개월 여 후인 1946년 5월 8일 박정희는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의 해방된 조국은 심각한 홍역을 앓고 있었다. 무질서와 극심한 좌우 대립으로 혼란스러웠다. 일제가 물러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고향인 구미와 서울을 오가던 박정희는 다시 군인의 길을 택했다.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3번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동기생 가운데 자신보다 9살 어린 김재규(전 중앙정보부장)도 있었다.
박정희는 같은 고향(경북 구미)인데다 교사 경험을 공유한 김재규를 상당히 신뢰했다. 5사단 사단장 시절 연대장 김재규를 부하로 데리고 있었다. 6.25 전쟁 중에는 9사단에서 함께 근무한 적도 있었다. 그를 향한 믿음은 10.26 사건에 이르러서야 멈춰 섰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기 얼마 전 그의 셋째 형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 도중 경찰에 의해 사살됐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던 형 상희를 무척 좋아하고 따랐다. 박정희는 형의 친구였던 이재복의 주선으로 남조선 노동당에 가입했다.
박정희는 상희의 큰딸을 돌봐주었는데 나중에 육사 후배이자 육본 정보국에서 함께 근무하던 김종필에게 소개시켜 결혼까지 이르게 했다. 즉 박정희는 김종필의 처삼촌이다. 이 결혼으로 박정희는 조카사위 김종필을 ‘임자’라고 부르게 됐다.
그의 남로당 경력은 5.16 군사정변 이후 미국으로 하여금 한동안 그를 공산주의자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 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 윤보선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사건은 박정희 인생에서 최대 위기였다. 여수의 14연대 소속 좌익 군인들이 일으킨 소위 ‘여순사건’은 이후 대대적인 숙군 작업으로 이어졌다. 당시 만해도 군 내부에 좌익들이 상당수 침투해 있었다.
박정희 소령은 11월 11일 육군정보국 수사대에 의해 체포됐다. 당시 박정희는 약혼녀 이현란과 동거 중이었다. 박정희가 쓴 자술서에는 ‘대구 10.1 사건서 피살된 형의 집에서 만난 이재복이 복수를 부추겨 남로당에 가입했다’ 고 적혀 있다.
박정희는 수사대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군대 내 많은 남로당 가입자들의 명단을 제공했다. 그 중에는 남로당과 관련 없는 자들도 있었다. 박정희는 당초 사형을 당할 처지였으나 수사과정에서의 협조와 백선엽, 장도영 등의 도움으로 1심 무기징역, 2심 10년으로 감형됐다.
백선엽은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을 뿐 아니라 일자리까지 주선했다. 당시 백선엽은 육군 정보국장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현역 아닌 문관으로 계속 정보국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이 문관이지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자리였다. 낙담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뜻밖의 인연이 다가 오고 있었다.
군내에선 육사 8기생들을 ‘풍운의 기’라고 불렀다. 인원도 많고, 일도 많고, 사고도 많았다. 1300여명의 졸업생 가운데 110명이나 별을 달았다.
이희성(전 육군참모총장) 등 4명은 대장까지 진급했다. 10명의 장관과 16명의 국회의원(겹치는 경우 포함)이 나왔다. 그들 가운데 김종필 등 성적 우수자 15명은 임관 즉시 육본 정보과에 배치 받았다.
박정희가 현역 아닌 문관으로 근무하던 곳이었다. 박정희는 이들 8기생 소위들과 거의 매일이다시피 술자리를 함께 했다. 5.16의 기운은 이 무렵부터 싹트기 시작한 셈이다.
1949년 10월 이용문 정보국장 후임으로 장도영이 부임했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 선배이자 한 살 위인 이용문과 친밀하게 지냈다. 하지만 6살 아래인 신임 상관 장도영과는 여러모로 익숙하지 않았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는 말이 있다. 불행은 혼자 찾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무렵 박정희의 인생에도 잇달아 시련이 찾아 왔다. 이용문 국장과 작별한 박정희는 또 한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다. 이번엔 여인이었다. 이듬해 2월 동거녀 이현란이 몰래 집을 나갔다.
그녀는 박정희가 남로당에 가입한 일로 체포되자 몹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둘 사이는 급격히 나빠졌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이별은 박정희를 점점 술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박정희의 인생 그래프는 밑바닥을 찍고 있었다.
보수인사 조갑제의 표현에 따르면 ‘생활은 어렵고, 아내는 가출하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죽고, 친구들은 그를 외면하던’ 시기였다. 박정희는 여순사건 때 동지들을 배신하고 혼자 살아남은 일로 인해 많은 친구들이 그를 외면했다.
젊은 육사 8기생 소위들은 불우했던 시절 박정희의 유일한 낙이었다. 원래 어려웠던 시절의 인연이 더 끈끈하고 오래가는 법이다. 그러는 사이 육군정보국은 북쪽의 동향이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유양수 정보과장은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 엄중한 정보는 묵살됐다. 군 당국은 도리어 유양수를 전방으로 전보 발령시켰다. 신성모 국방장관과 경무대는 북의 남침 정보를 애써 외면했다. 당시 남한의 군사력으론 도저히 북한군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들에겐 진실을 마주할 용기조차 없었다.
한국군보다 우월한 정보력을 지닌 미군 역시 남침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었다. 미군은 ‘북한이 남침할 능력은 있으나 그럴 의지는 없다’는 억지 논리를 펴고 있었다. 국방부 고위층은 육군정보국보다 미군의 정보력을 더 신뢰했다.
1950년 6월 24일 김종필은 육본에서 야간 당직 근무를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어머니 제사를 위해 고향 구미에 내려가 있었다. 25일 새벽 전방으로부터 다급한 소식이 김종필에게 전해졌다.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남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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