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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의 기록들

[김명환의 시간여행] [16] 중앙선 넘은 택시 한 대 때문에…

by 까망잉크 2022. 11. 5.

[김명환의 시간여행] [16] 중앙선 넘은 택시 한 대 때문에… 차량 2천대 뒤엉켜 한밤 아수라장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4.27 03:00
 

토요일이던 1971년 3월 27일 저녁, 서울 청량리에서 신설동에 이르는 2㎞ 도로가 아수라장이 됐다. 차량 2000여대가 아홉 겹, 열 겹으로 뒤엉켜 2, 3시간 동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운전자들은 요란하게 클랙슨만 울려댔다. 일반적 정체 상황을 넘어서는 사태였다. 긴급 출동한 경찰은 신호등을 모조리 끄고 엉킨 차량을 수신호로 한 대씩 푸느라 자정이 다 되도록 고생했다. 어이없게도, 사태를 일으킨 건 단 한 대의 택시였다. 경동시장 앞 네거리에서 차량 정체로 서 있던 택시가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하려다 반대편 차들과 엉키면서 연쇄반응이 시작됐다고 경찰은 설명했다.(조선일보 1971년 3월 28일자) 질서 의식도, 돌발 상황을 수습할 시스템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시대였다. 황당한 교통 전쟁은 한 달도 못 돼 또 터졌다. 1971년 4월 12일 아침 러시아워 때 종로, 을지로 등 도심지에서 출근 차량이 서로 먼저 가려고 차선을 침범하다가 수천 대가 뒤엉켜 30분 이상 도심이 마비됐다. 이날 조흥은행 본점 부근에선 시내 방향으로 진입한 차량 중 거의 절반이 중앙선을 넘었다.

1970년 어느 날 아침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교통대란이 빚어졌다. 출근길 차량이 서로 먼저 가려고 중앙선까지 침범하다 뒤엉키는 바람에 버스, 택시, 승용차들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1970년대에 들어서자 도심 교통 대란이 종종 빚어졌다. 초만원 버스 승객의 고통을 묘사할 때 쓰던 '교통 지옥'이란 단어가, 꽉 막힌 도로에 갇혀 있는 자동차들을 표현할 때도 동원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사태가 빚어졌을까. 당시 신문들은 '마이카 시대' 개막에 따른 차량 증가를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1961년 2만9000대에 불과하던 전국 자동차는 1970년에는 5배가 넘는 15만6000대로 급증했다. 그러나 '차량 증가'만으로는 40여년 전 교통 마비 사태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1971년 서울의 자동차는 약 5만6000대로 오늘날 등록 대수(305만대)의 50분의 1도 안 됐다. 당시 어느 학자는 "도로 면적이 서울의 2배에 불과한 로스앤젤레스에서도 100만대의 차량이 혼잡하지 않게 움직인다"며 서울 교통 대란의 근본 원인은 전문성 없는 교통 행정에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엔 교통 관련 시설부터 빈약했다. 1969년 서울의 교통 신호등은 달랑 67개인데, 대부분 10년이 넘은 구식이었다. 일정 간격으로 기계적으로 신호가 바뀔 뿐, 교통량을 감안해 신호 주기를 조정하는 것 같은 일은 꿈도 못 꿨다. 차량이 러시아워에 도심 교차로를 통과하려면 신호를 세 번은 받아야 했다. 더 심각하게 빈약했던 건 시민의 준법 정신과 질서 의식이었다. 어느 신문 사설은 문란한 교통 질서를 개탄하면서 "도무지 이 땅에 도의가 있고 인간의 양심이 살아있으며, 법이 있고 인간의 생명을 아낄 줄 아는 최소한의 마음가짐이 있는가"라고 준엄하게 물었다.

5만여 대의 차량 갖고도 쩔쩔맸던 서울엔 이제 305만여대가 굴러다닌다. 첨단 교통 관리 시스템들도 활약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앞으로 2년 이내에 서울의 교통신호 제어기들은 무선통신으로 연결돼 '지능형 신호제어'를 한다고 한다. 교통 관련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한 듯하다. 하지만 내 갈 길 급하다고 '선'을 넘었다가 모든 이웃을 고통에 빠뜨렸던 몰염치와 불법은 얼마나 사라졌는지 따져볼 일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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