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사막같은’ 이태원, “물 한모금이 황금처럼 귀해”
입력2022.11.05. 오전 6:01 수정2022.11.05. 오전 11:46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일본인 거주 남촌에 수도관 집중, 8000명 사는 이태원엔 우물만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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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일제는 일본인이 주로 사는 남촌에 수도관을 거미줄처럼 깔아 수돗물을 공급한 반면, 조선인이 대부분인 북촌과 1936년 경성에 편입된 이태원, 공덕 등지에는 수도관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조선인 대부분은 식수를 우물물에 의존하는 민족차별을 겪었다.
‘우리 동리 이태원정(町)은 턱앞에는 칠백리의 긴 물줄 한강이 보기 좋게 놓여있고, 등 뒤 수철리(水鐵里·금호동 일대) 산 등에는 경성부의 대(大)수원지가 있어 10년 대한(大旱)이 들더라도 이곳 사람들은 물 걱정은 없으리라고 추측하겠지만, 그러나 이태원의 물난리란 요만조만한 것이 아니다. 8000여명이나 사는 곳에 우물이 단지 다섯 개밖에 아니되니 물 한모금이란 이곳에서는 큰 황금같이 귀하다.’(‘사막 같은 이태원정에 어느 때나 수도를 시설?’, 조선일보 1938년 9월21일자)
1938년 이태원 주민이 신문에 투고했다. 조선시대 한성부(漢城府)에 속했던 이태원은 1914년 고양군에 편입됐다가 1936년 4월 다시 경성부로 들어왔다. 경성부 소속이 됐지만 기반시설은 빈약했다. 특히 식수문제가 심각했다. 8000명 사는 동네에 우물이 5개 밖에 안된다니 그럴 만했다.
이 주민은 ‘새벽부터 밤 깊도록 물싸움이 지독하다’면서 ‘이건 사막이래도 이런 지독한 사막지대는 별로 없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여기도 경성부 이태원정이라 하니 수도 좀 맛 볼 수없을까요? 수도는 어떤 사람만 먹는 것인가요?’라고 하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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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대부분 수돗물을 사용하는데, 조선인은 2할 밖에 안된다고 지적한 조선일보 1926년12월28일자 기사
'수돗물은 근대의 상징’
식수난(亂)은 경성부에 새로 편입된 이태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경성부의 조선인 주민 대부분이 식수난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1910년대까지 조선인 대다수는 우물과 강물을 식수원으로 썼다. 1920~1930년대는 도시에서 전통적 우물 대신 상수도가 급속도로 전파된 시기였다. 우물은 전염병 온상이자 불결을 상징하는 낡은 시대의 유물로 간주됐다. 수돗물은 찬란한 근대 문명의 상징이었다. 우물물을 길으러 갈 필요없이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니 반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미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상수도 보급은 1920년 대규모 콜레라 유행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 해 경성부민 전염병 사망자 중 조선인은 983명이나 됐다. 일본인도 266명이 죽었다. 동네마다 자위(自衛) 방역단이 생겨났고 위생과 방역이 제1의 우선순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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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의 수도료가 동양 제일로 비싸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1927년2월18일자 기사. 일본보다도 30~40% 더 비싸다고 했다
조선인은 29%만 수돗물 사용
문제는 행정을 책임진 경성부가 일본인 지역(남촌) 위주로 상수도 배관을 설치했다는 점이다. ‘일본인촌(村)인 남부는 경성부에서 가설한 수도선이 지주망(蜘蛛網·거미줄)같이 얽혀 있으나, 조선인촌인 북부 경성은 전항에 말한바와 같이 몇 개의 간선뿐임으로 대개는 우물물을 먹게 되어 여름이면 전염병을 예방할 도리가 없는데….’(‘경성수도는 남부 전용물, 조선인은 불과 2할’, 조선일보 1926년12월28일)
기사에 따르면, 1926년 11월 수돗물을 먹는 경성의 일본인은 7만5166명으로 전체 일본인의 85%인데 반해, 조선인은 6만3456명으로 전체 조선인의 29%밖에 안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5년이 지난 1931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수도를 쓰는 가구는 조선인은 1만6366호(전체 5만1000호), 일본인 2만1820호(전체 2만2000호)로, 일본인은 거의 전원이 수돗물을 쓰는 반면, 조선인은 약 32%만 수돗물을 이용했다.(‘府內 수도 사용 조선인 4할, 일본인은 거의 全數’, 조선일보 1931년 3월13일) 신문들은 이런 기사를 지속적으로 내보내면서 일제의 민족차별을 비판했다.
경성부의 수도계량제, 가난한 조선인들 우물물로 내몰아
조선인이 위생적인 수돗물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한 요인은 또 있다. 1924년9월1일 경성부는 사용량에 따라 수도 요금을 부과하는 미터제를 실시했다. 그러자 수돗물을 얻어먹던 조선인 빈민들은 다시 우물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경성수도 卽賣制로 위협된 시민위생’, 조선일보 1924년10월3일)
‘남의 행랑에 있는 사람으로 종전에 주인집의 열쇠를 빌려서 물을 다소간 얻어먹고 살던 사람들은 대타격을 만나서 ‘한 지게에 오리씩’하는 물이나마 사먹을 수가 없는 형편임으로 잡용에 사용하려고 하놓은 우물(井水)로 기어들게 되었는데, 경성에 있는 ‘우물’은 어떠한 것임을 불구하고 모두 불결할뿐만 아니라 수질에 매우 해독이 많은 까닭으로 그 물을 먹는 사람들중에는 병에 걸리어 신고하는 사람도 있다하여 그의 자세한 수효는 알 수없으나 어떻든 우물물을 먹는 사람이 많이 있게 된 것은 사실…’(‘위험한 井水사용’, 조선일보 1924년10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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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가 1924년9월부터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징수하는 수도계량제를 실시하면서 김장철을 맞은 주민들이 용수난을 겪고 있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1924년10월21일자 기사
'매일 살풍경한 수도의 소동이 끊일 새없다’
경성부의 수도계량제에 대한 비판은 거셌다. 행정당국이 어떻게 주민을 상대로 돈벌이를 할 수 있느냐며 추궁했다. ‘경제학상의 소위 자유화(自由貨)에 속하는 물은 경성에 있어서 가장 부자유한 고가의 상품이 되고 말았다’고 시작한 한 신문 사설은 ‘수도 계량제 실시 후 매일 살풍경한 수도의 소동이 끊일 새 없다’고 지적했다. 영세민이 비위생적인 우물물을 먹을 수밖에 없도록 내몰았다면서 곧 닥치는 김장철에 얼마나 큰 부민의 고통이 있을지 ‘당국자는 아는가, 모르는가’라고 호통쳤다. (’경성수도 공황’, 조선일보 1924년10월23일)
수도계량제 탓에 우물물을 먹는 조선인이 늘어나자 경성부 당국자도 걱정할 정도였다. ‘♦경성부에서 수도를 인계하여 간 뒤로 계량제를 실시하더니 그 뒤로는 물을 얻어먹기가 어찌 어려운지 우물물을 먹는 이가 늘었다 한다. ♦그런데 음료수에 적당하지 못한 물을 먹는 곳이 있어 위생상에 큰 염려일 뿐 아니라 전염병 환자가 늘어가는 원인이 거기에 있는 것같다고 경성부 위생과장은 말하였다 한다.’(잔소리, 조선일보 1924년9월5일)
'동양 최고의 물값’
미터제로 바꾼 경성의 수도 요금은 동양 최고라는 말이 나올 만큼 비쌌다. 대구, 원산보다 10% 더 비싼 것은 물론 일본의 각 도시보다 30~40%나 비쌌다고 한다.(‘경성의 수도 요금은 동양 제일의 고가’, 조선일보 1927년2월18일) 그나마 급수제한과 단수가 연중행사처럼 발생했다. 이 때문에 요금인하운동 얘기도 심심찮게 나왔다. 하지만 당국자들은 수원지(水源池) 유지비가 비싸기 때문에 요금을 내릴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공짜나 다름없는 우물물 대신 비싼 수돗물을 사먹게 된 데는 총독부의 무능한 행정 탓도 컸다. 도시 팽창에 따른 하수도 시설 정비에 재원을 투자하지 않아 우물이 오염됐기 때문이다. 인구는 급증하는데 분변이나 생활하수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개천이나 강물에 흘려보내면서 오염이 심각해졌다.
'지렁이,물벌레가 나오다니...’
게다가 경성의 수돗물은 벌레나 불순물이 나오기 일쑤였다. ‘경성부의 수도는 여름마다 지렁이가 나오느니, 또 무슨 이름모를 물벌레며 모래 같은 것이 나온다고 하야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데, 더구나 그것이 전염병도시라는 별명을 듣고 있느니만치 수도에 대해서는 일반 시민의 신경이 날카로워서 적지않은 불안과 의심을 가지고 있다’(‘경성 수도망에 이상’,조선일보 1936년3월7일)고 보도할 정도였다. 100여년 전 ‘근대의 총아’ 수돗물이 일으킨 파란이었다.
◇참고자료
김영미, 일제 시기 도시의 상수도 문제와 공공성, 식민지 공공성-실체와 은유의 거리, 책과 함께, 2010
김백영, 지배와 공간: 식민지도시 경성과 제국 일본, 문학과 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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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kichul@chosun.com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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