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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

[요즘에] 11월의 노래

by 까망잉크 2022. 11. 9.

[요즘에] 11월의 노래

입력2022.11.07. 오전 5:01

이근구 시조시인

동짓달 대지위에 시를 쓰는 낙엽들

모두가 떠났어도 뒷얘기는 남아 있어

봄여름 푸른 기약들 갈색으로 속삭인다

세월은 무심으로 사철을 되돌리고

그 갈피 희로애락 울고 웃는 온갖 삶이

조락의 고엽 밟으면 나목을 닮아간다

잎 진 나무 가지엔 새봄이 숨어있고

왕복 없는 인생길엔 도돌이표가 없어

만추의 등 굽은 황혼 주름 깊게 저문다

11월을 동짓달이라고 한다. 동짓달 하면 우선 황진이의 시조가 떠오른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참으로 기막힌 표현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내어' 누가 이런 절묘한 표현을 시로 쓸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오로지 황진이만이 표현할 수 있는 시공간의 재단인 것이다. 그 발상 자체가 참으로 신선하고 시간을 가위로 옷감 자르듯 잘라낼 수 있다는 생각의 표현은 절창 중의 절창인 것이다. 중장의 '춘풍 이불'의 따뜻한 사랑의 극치와 종장의 '굽이굽이 펴리라'의 간절함 또한 소망과 겸손의 사랑이 넘처 나는 표현으로 대학생들이 뽑은 빼어난 시조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조를 사랑하는 나는 동짓달이 되면 으레 황진이의 시조가 먼저 떠오른다.

동짓달이란 명칭은 11월에 동지가 들어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동지는 겨울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은 아침, 점심, 저녁 때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주의 섭리이지만 우리들은 인간의 감성에 의해 정서의 변화를 맛본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올 무렵엔 희망과 기쁨이 자연스레 느껴지듯이 11월은 만추의 낙엽이 흩날리고 가을과 겨울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쓸쓸함과 까닭모를 고독을 감수하며 나목들을 바라보고, 한해의 내 발자국이 올곧았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떨어져 쌓인 낙엽과 빗살처럼 나목들이 줄지어 서 있는 산의 능선들을 바라보며, 다른 계절에 볼 수 없는 비움과 쓸쓸함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도 있는 것이 11월이 주는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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