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그려지듯이 중종은 우유부단하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첫사랑과 아들에게 사약을 내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가장이었습니다. <실록>에서도개혁조선을 위한 왕으로써이렇다한 치적이나 진정성도 없이 자리버티기만 급급하다가 개국공신들까지 사지로 내몰며 성군으로 남을 기회를 잃어버리는 찌질이에 불과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조광조에 의한 이상적인 개혁방법이 훈구파의 반발을 사서 발생한 기묘사화(己卯士禍)이후였기에 불안한 정치상황에서 간신들까지 판을 치며 정국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중종의스트레스도 심해서,고질적으로목과 어깨통증에 힘들었다고 합니다. <왕조실록>에는 “어깨죽지와 견갑골의 통증이 자주 있었는데, 시큰거리면서 더러는 아팠다가 더러는 나았다가 한다.”고 기록합니다. 여러치료에 매번 효과를 보지못해 정사를 쉬었다고도전합니다.
광해군에게 허준이 있었다면, 중종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건강을 대장금에게 의지했다고 하는데요. 드라마 <대장금>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이 시기로. 이 때는 의관이 아닌 의녀가 맥을 보았다고 합니다.
<실록>에 의하면, 중종 27년 10월 21일 “요즈음 풍한증이 있어서 이 때문에 오른쪽 어깨가 붓고 아프다. 어제 약을 하문하겠으니 내의원 관원 하종해와 홍침을 불러 맥을을 본 의녀을 말을 듣고 나서 합당한 약을 올리게 하라.”고 전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겨울이 되면, 왕을 위해서 악귀를 물리치고 몸을 보하는 특별한 보양식으로 우족에 쇠머리가죽과 대추, 계피, 후추, 꿀 등을 넣어 고아 굳힌 ‘전약(煎藥)’을 올렸는데, 여기에 따뜻한 성질의 약제로 정향이나 생강 등을 추가해서 묵처럼 만들어 진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534년에는, 조선의 다른 왕들처럼 ‘종기’가 심하여서 6개월동안 정무를 보지 못한채 방에서 누워만 지내기도 했을 정도였다고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조실록>에는 “여러 약을 먹어도 낫지 않고, 진물과 고름이 섞어 나오기에 거머리로 시험해보니 살이 단단하고 도독해진 곳과 고름이 삭아서 펀안해졌다.”며 거머리의 효과를 칭찬하는 장면도등장합니다.
이 외에도 감기가 끊이지 않아 열성혼수까지 앓고, 만성치주염을 호소하며, 아랫배가 아파 변을 볼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러 질환들로 고생하는 노환에 울화병까지 겪다가 결국 대장염과 합병증까지 겹쳐 57세에 승하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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