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살에 세자책봉되고 25년간 제왕실습을 한 준비된 군주였습니다. 천성이 조용하고 온화했던 성품은 인종 1년 7일 <실록>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자질이 순미(純美) 침착 온후하며, 학문은 순정(純正)하고 효우(孝友)는 타고난 것이다. 동궁에 있을 때부터 종일 바로 앉아 언동을 때에 맞게 했으니 사람들이 그 한계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위한 뒤로 장사할 즈음에 처결하고 보답하는 데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고, 때때로 어필(御筆)로 소차(疏箚 상소 혹은 보고문에 대한 임금의 답)하되 말과 뜻이 다 극진하므로 보는 사람이 누구나 탄복했다.”
인자하며 효성까지 가득했지만, 매일같이 문정왕후의 억지와 압박에 맘고생이 심했으며, 그럼에도 자신의 불효만을 자책한 것이 그를 시름시름 앓게 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 중종이 아팠을 때에는 곁에서 복장을 벗지않고 밤낮으로 모셨으며 친히 약을 달이고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으며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 어선(御膳)을 전혀 드시지 않았을 정도로 효자였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20여일이나 하고, 중종이 돌아가시자 5일이나 음료를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세자시절 동궁에 큰 불이 났는데, 세자빈에게 먼저 나가라고 하시고, 어머니 문정왕후를 위해서 죽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학문을 좋아하여 왕에 오르면서는 기묘사화(己卯士禍)의 희생자들을 품어주고, ‘현량과(賢良科)’를 부활시키며 고른 인재등용하여 어진 유교정치를 피려하였습니다.
하지만, 계모 문정왕후의 고약한 성정과 야심가득한 권력욕에 시달려 겨우 9개월 왕좌로 삶이 마감되면서, 조선 역대 임금중 재위기간은 가장 짧았습니다.
어려서부터 튼튼하지 못했던 인종은 왕이 된 후 각종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문정왕후 문안인사자리에서 떡을 먹은 후부터 몸이 안좋아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종의 왕비가 왕을 보호해야겠기에 궁궐의 후미진 ‘청연루(淸燕樓)’로 옮겨서 간호했어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죽기 한 달전 <조선왕조실록> 1545년 6월 4일부터는 몸상태가 악화되고 있었으나 신하들에는 괜챦다며 진료를 받지않아도 된다고 고집부리다가 건강이 더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기력회복을 위해 고기를 권하는 신하들에게는 “대비 문정왕후께서도 고기를 드시지 않는데 어찌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느냐.”고 거부했지만, 스스로가 독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상당했을 것입니다.
결국 효자였던 인종은 아버지죽음을 슬퍼하며 쇠약해진 몸에, 음식을 잘못 먹은 이질합병증으로 31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착한 군주의 지극한 효성에도 마음고생이 몸을 버텨내지 못한 안타까운 이야기로 남겨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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