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부인가, 잔다르크인가... 130년 전 명성황후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작가는 인터뷰 장소로 경복궁 안 건청궁을 골랐다. 건청궁은 궐의 가장 안쪽에 있다. 가을 단풍 아래,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느라 한창이었다. “이곳이 명성황후가 1895년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장소입니다.…”
소설가 손정미(56)의 이번 소설 주제는 ‘명성황후’다. 신문 기자 출신인 그는 역사 소설을 주로 써왔다. 삼국 통일 직전 경주를 무대로 한 ‘왕경’, ‘광개토태왕' 등이 대표적이다. “구한말은 끝끝내 피하고 싶었다”고 했다. 망국(亡國)의 역사가 서글프고, 비극적이어서다. 그렇지만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자신도 잘못 알고 있었던 게 너무 많아, 명성황후가 억울해할 것 같았다.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나라를 뺏긴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집필에만 2년 반이 걸렸다. 책 제목은 ‘그림자 황후’.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한 사내를 그림자처럼 사랑한 여인의 모습을 담았다.
◇명성황후에 대한 오해 풀고 싶다
–왜 명성황후였나.
“명성황후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고 했더니 주위에서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잖아’였다. 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정작 잘 모르더라. 사람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건 뮤지컬이나 드라마를 통해 본 감성적이고 인상적인 단편일 뿐이었다.”
–명성황후는 그 어떤 인물보다 후대의 평가가 엇갈린다. 나라를 망하게 한 독부(毒婦)와 조국을 위해 싸운 ‘조선판 잔 다르크’라는 상반된 이미지다.
“많은 부분이 일본에 의한 왜곡이라고 본다. 일본이 보기에 명성황후는 기가 막히게 똑똑하고 전략적이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외교란 개념이 없었다. 그런데 명성황후가 우리가 무력이 안 되면 무력을 달성할 때까지, 강군이 될 때까지 외교로 극복해야겠다며 나섰다. 그러니 일본으로선 가만 놔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시해한 것이다. 그걸 합리화하려면 명성황후를 이상한 사람으로 깎아내릴 수밖에 없다.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라이벌 관계를 부각하고, 고종은 무능하고 바보 같은 군주로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광복 이후 잘못 쓰인 역사가 그대로 답습됐다.”
–어떤 부분이 그런가.
“대부분 명성황후가 친척인 민씨들을 등용해서 국정을 쥐락펴락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배웠다. 고아처럼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왕비가 권력 맛을 보고 절대 놓지 않으려 했다고. 그런데 고종과 대원군의 어머니가 여흥 민씨다. 고종이 대원군이 물러난 다음 친정(직접 통치)을 할 때, 전주 이씨 사람들은 대원군 파이니, 자기 쪽 사람을 두기 위해선 어머니 쪽 여흥 민씨 사람들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명성황후가 고아라거나 한미한 집안이란 사실도 잘못 알려진 것이다. 여흥 민씨는 원경왕후와 인현왕후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또 아버지가 어려서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딸이 왕비가 되고 나서도 살아 계셨다.”
–'(황후는) 비범한 외교관' 등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이 쓴 표현을 여럿 인용했다.
“실제 인물들이 평가한 부분은 다 사실을 인용해 썼다. 당시 조선에 왔던 외국인들은 조선에 우호적인 감정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일차적으로는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사람들로, 조선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언더우드 부인뿐 아니라 조선에 온 서양인들이 명성황후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많이 했다. 알렌 선교사는 굉장히 냉소적인 사람인데도 명성황후를 높게 평가했고,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 역시 명성황후의 리더십과 명민함을 높이 샀다.”
–어떤 점 때문에 그랬다고 보나.
“나는 한국 여성들이 정말 우수하다고 생각하는데, 명성황후에게서도 그런 부분이 잘 나타난다. 어려서부터 굉장히 영민했고, 강인한 정신력을 지녔다. 명성황후가 언더우드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 ‘이번에 미국 대통령이 민주당으로 바뀌었죠?’라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황후는 외국 신문을 중국을 통해 들여와서 그 실상을 파악했다. 연경(베이징)에서 최신 서양 서적도 구해 끊임없이 읽었다. 1894년엔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해서 사실상 왕과 왕비를 궁 안에 연금한 일이 있었다. 당시 모든 문을 막고 친일파들만 입궁을 허락했다. 선전 포고도 안 한 침략인 셈인데, 그때 명성황후가 생각한 게 일본이 서양인들에게 약하다는 점이었다. 그 생각이 주효했다. 외교 문제로 비화할까 걱정한 일본이 서양인들의 입궁은 막지 못했다. 황후는 그들을 경복궁 향원정에 초청해 티타임을 하면서 일본의 실상을 알렸다.”
–고종 역시 개화에 적극적인 군주로 그려진다.
“1886년 고종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이자 영어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설립한다. 빨리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인재를 양성하고 싶어서. 그러고서도 얼마나 마음이 급했으면, 자신이 직접 영어 시험장에 들어가서 감독까지 한다. 그만큼 열의가 있었다. 공부를 할수록 고종 황제가 결코 수동적이거나 무능한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쇄국정책을 폈지만,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였다. 그것도 고종 황제가 즉위할 때 매우 기뻐서 축하 미사를 부탁했을 정도로 신실한 신자. 어머니 영향을 고종도 받았을 거라고 본다. 또 고종의 스승이 연암 박지원 손자이자 개화파의 선구자 박규수였다. 박규수가 논어 맹자만 가르쳤겠나. 자신의 사상을 암암리에라도 전했을 것이다.”
–망국의 군주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가 나라를 망하게 한 게 아니라, 일본이 강탈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강도가 아닌 도둑맞은 사람들을 탓한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내분이 없나? 여전히 권력형 비리는 많고, 정파 간의 싸움은 극심하다. 왜 무능해서 나라를 빼앗겼느냐고 돌을 던져선 안된다.”
#. 안중근은 즉시 러시아에 체포된 뒤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다. 다시 여순감옥으로 옮겨져 일본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 공을 왜 살해했나?” “첫째, 일본 병정을 시켜 대한제국의 황후 폐하를 시해했기 때문이다.”<그림자 황후2·303쪽>
–소설 마지막은 안중근으로 끝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쐈을 때, 첫 번째 이유가 나는 국권 침탈인 줄 알았다. 그런데 명성황후 시해였다. 시해 장면을 쓸 때 마음이 아파서 그 부분을 한참 동안 쓰지 못했다. 나는 일본 불매 운동보다 역사를 바로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설가 박경리가 소설 쓰기 권해
손정미는 마흔여섯에 돌연 기자를 그만두고 소설가가 됐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소설가이고 싶었다. 취재원으로 만난 박경리 작가에게 어렵사리 완성한 단편 원고를 보냈다. 박경리 선생이 재능이 없다고 하면 미련을 끊을 참이었다. 박경리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손 기자, 소설 써.”
–지금까지 대부분 역사소설만 썼다.
“나도 내가 그럴 줄 몰랐다(웃음).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면서 내 정체성부터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역사를 알아야 하겠더라. 삼국유사부터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국사 시간에 ‘임오군란 1882년’, 이렇게 연도 중심으로 한 줄씩 배운다. 실은 그 한 줄에 어마어마한 일들과 의미가 들어 있다. 이걸 재밌게 소설화해서 알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10년 동안 7권의 책을 썼다.
“생활인으로서 밥 먹고, 살림하는 것 외에는 모든 시간을 소설 쓰기에 투자한다. 지난 2년간 그림자 황후를 쓰느라, 남들 다 봤다는 ‘오징어 게임’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아직 못 봤다(웃음).”
–역사 고증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기자 출신이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실록과 승정원일기는 물론이고 1차 기록물도 많이 참고한다. 이번에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남긴 ‘사화기략'과 강화도 조약 당시 교섭을 벌였던 사람들이 쓴 일기도 다 찾아봤다. 그래야 그때 당시 사람들 심정이 어땠고, 일본이 우리를 어떻게 겁박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궁중 예법과 복식, 말투도 많이 신경 썼다.”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나는 고조선이 우리 민족의 맹아(萌芽)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상과 문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가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금 우리를 해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근거를 제시할 거라고 본다. 고조선은 꼭 써야 할 것 같다.”
–박경리 선생에게 보여 줬다는 습작은 어떻게 됐나.
“이사하면서 잃어버렸다. 박경리 선생과의 만남은 생각할수록 운명 같다. 내가 문학 담당 기자였을 때, 박경리 선생의 ‘토지’ 완간이 있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선생을 취재할 계제가 없었을 것이다. 소설가로서의 삶을 오래 고민했는데, 선생이 내게 결정적인 희망을 주셨다. 회사 그만두고 그동안 습작한 원고지를 다 모았더니 내 키만 하더라.”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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