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 억새 언덕, 낙엽향 진동하는 치유의 숲에서… 가슴 속 응어리진 氷點이 사르르 풀렸다
[아무튼, 주말] 영화 ‘핏’으로 신인상 받은
김민승 감독과 양평 여행
바스락바스락. 발자국마다 낙엽 소리가 났다. 붉게 물든 숲길은 부드럽고 포근했다. 하늘 높이 떠 있는 구름은 한 폭의 그림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숲에서는 까마귀가 나직하게 울고 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는 평화로웠다. 곧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고소하면서도 쌉싸래한 냄새가 났다. 잘 볶은 커피 향 같다. 젖은 낙엽 냄새, ‘만추(晩秋)의 향’이다.
낙엽 밟는 소리에는 평소 자연에서 듣기 어려운 고주파가 있어 우울증 치료에 좋다고 한다. 낙엽과 흙의 향은 그 편안함으로 니치 향수로 자주 출시된다. 색채심리전문가들은 대지의 색을 담은 낙엽을 보고 있으면 좋았던 기억과 슬펐던 추억이 동시에 떠오른다고 했다. 이 색과 향과 소리는 첫눈이 오기 전인 지금 이 계절에만 경험할 수 있다.
이곳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산음자연휴양림에 있는 ‘치유의 숲’이다. 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양평에는 치유의 숲만 세 곳이 있다. 그중 이곳이 가장 빽빽하고 조밀하다. 마치 소설 ‘빙점’의 배경이 된 일본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의 시험림 같다. 소설 ‘빙점’은 유괴범에게 딸을 살해당한 한 남자가, 바람 피우다 딸을 방치한 아내에 대한 복수심으로 유괴범의 딸을 입양해 키우면서 겪게 되는 딜레마를 담고 있다. 부부는 돈과 권력, 아름다움으로도 얻을 수 없는 행복 속에서 끊임없이 아파한다.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필름 어워즈, 베를린 인디 필름 페스티벌 등 전 세계 17개 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등을 받은 김민승(34) 감독의 영화 ‘핏(PIT)’도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정은표)와 유괴범으로 지목된 남자 사이의 딜레마를 담고 있다. 딸을 찾고 싶은 아버지는 유괴범으로 지목된 남자를 구덩이에 빠뜨려 자백을 받길 원한다. 유괴범으로 지목된 남자는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한다. 인생의 매 순간은 딜레마로 가득 차 있다.
물리학도였던 김 감독은 33세 늦은 나이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 후 이 작품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서울이 고향인 그는 사업의 성공과 실패 등을 경험한 후, 치유와 영감을 위해 경기도 양평에 전원주택을 짓고 이사했다. 영화 ‘PIT’은 이곳에서 대본을 쓴 작품이다. 그와 함께 당일치기 양평 여행을 떠났다.
◇영화인들이 숨겨놓은 ‘설매재’
영화판에는 ‘로케이션 헌터’라는 직업이 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촬영에 적합한 장소들을 수집한 후, 의뢰받은 시나리오와 딱 맞는 촬영지를 추천하고 연결해주는 사람이다.
양평 유명산의 ‘설매재’는 이런 로케이션 헌터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 중 하나다. 영화 ‘관상’과 ‘왕의 남자’ 등 수십편의 작품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영화 ‘관상’에서 기생 연홍(김혜수)이 초야에 숨어 지내는 관상쟁이 김내경(송강호)을 찾아가는 길, “공기 좋네, 경치 좋고”라고 말하는 드넓은 억새 언덕이 바로 이곳, 설매재 고갯길이다.
찾아가는 방법은 조금 어렵다. 먼저 설매재 자연휴양림을 내비게이션에 찍는다. 그 장소에 도착했을 무렵, 차에서 내리지 않고 배너미고개까지 조금 더 올라간다. 그러면 도로 왼쪽에 유명산 ATV오프로드 체험장이 나오고, 그 옆에 하얀 철문 뒤로 산을 향해 길이 나 있다. 차량 차단기가 있지만, 비상업적인 용도로 들어가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여기서부터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억새 언덕 위 김내경의 집이 보인다. 집 마당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근심이 사라진다. 인적이 드물어 억새풀 스치는 소리만 들리는 곳. ‘이런 절경을 영화 관계자들만 알았다니!’ 섭섭한 마음마저 든다.
설매재란, 눈이 많이 내려도 매화가 피어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때는 화전민이 땅을 일구기도 했고, 말을 키우던 마장도 있었다고 한다. 고개를 돌리면 대부산, 어비산이 사방에서 보인다. 눈길 닿는 곳 어디에도 현대 문명의 흔적은 없다. 사극 촬영지로 각광받는 이유다. 주변 경치를 벗 삼아 가을 정취를 즐기다 보니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다.
설매재가 있는 이 동네는 ‘용천리 마을’로 불린다. 첫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6년 사료에 실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백현리, 편전리, 사천리, 갈현리를 합쳐 ‘용천리’라 정했다. 용문산 밑에 있는 사천리 일대라는 뜻이다.
30대 초반, 전원생활을 원했던 김 감독은 서판교, 구리, 남양주 등에 있는 전원주택 부지들을 보다가 용천리의 위치와 경치에 끌려 이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다른 곳보다 거리상으로는 멀 수 있지만, 주말에 차가 거의 막히지 않아 접근성이 좋았어요. 사람들이 적어 평온을 찾기에도 좋았고요.”
◇금화가 깔린 듯한 은행나무
억새보다 단풍이 그립다면 유명산보다는 용문산이다. 그중 으뜸은 용문사의 1100년 된 은행나무다. 지금은 바닥에 은행나무잎이 다 떨어졌지만, 웅장한 나무 아래 금화가 잔뜩 뿌려진 것 같은 대지를 보는 것도 장관이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에 창건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전후해 두 번이나 찾은 사찰로도 유명하다. 이 은행나무는 통일신라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고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심었다는 설도 있고, 의상대사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 은행나무가 됐다는 설도 있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소리를 냈다는 전설도 내려오는데, 정미의병 항쟁 때는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다고도 한다.
굳이 전설을 듣지 않아도 은행나무를 마주하면 알 수 있다. 어지간한 간섭에 흔들릴 나무가 아니다. 높이가 약 42m, 밑동의 둘레가 15.2m에 달한다. 우리나라 최고령이자 가장 큰 은행나무다.
설매재에서 용문사까지는 차로 30분 남짓, 다소 멀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가는 길이 장관이다. 용문사 입구까지 굽이치며 이어지는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용문사 주차장에서 내려 걷는 숲길도 붉은 단풍나무들이 아치 형태로 환영해준다. 가는 길목에 있는 출렁다리도 짜릿하다.
◇첫사랑의 아련함 ‘구둔역 폐역’
영화 속 주인공 느낌을 조금 더 느끼고 싶다면 양평군 지평면 ‘구둔역 폐역’으로 가보자. 영화 ‘건축학 개론’,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표지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구둔역은 1940년 중앙선에 설치한 역이다. 중앙선은 서울 청량리, 원주, 안동, 경주를 잇는 철도로 일제강점기 물자의 공급과 운반을 위해 일본이 설치했다. 철도 노선 변경으로 2012년 폐역이 됐다.
역 건물에는 손님이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과 역무원이 일을 보는 ‘역무실’이 있다. 역 건물의 지붕은 책을 엎어 놓은 모양이다. 철도 쪽 대합실 출입구에는 비와 햇빛을 가리는 지붕이 설치돼 있다. 일제강점기 철도 역사(驛舍) 건축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인지 레트로한 느낌이다. 버려진 폐역이 주는 쓸쓸함과 고독함은 첫사랑처럼 아련하다.
현재 역사는 12월 말까지 공사 중이다. 그러나 실망할 것은 없다. 역사 뒤편 철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수업 시간 강 교수가 “어디 좋은데 가서 놀다 와. 요새 날씨 좋잖아”라는 말에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이 양팔을 뻗고 걷던 그 철로다. 영화 속 날짜도 11월 11일. 딱 지금 이맘때다. 철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영화 OST인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흐를 것만 같다. 조금 더 편하게 즐기라고 철로 한가운데 의자도 놓여 있다.
◇예술이 꽃피는 도시, 양평
김 감독의 어머니는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었다. 어릴 적 그는 어머니를 따라 미술관이나 갤러리 가는 것을 좋아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나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갔을 때도 어머니는 어린 김 감독에게 도슨트처럼 작품에 대해 설명해줬다. 그가 영화에 눈을 뜨기 전에 먼저 접한 것이 그림이었다. 그에게 영화란, 무한히 많은 캔버스들의 연결이다.
인구 12만명의 양평은 인구 대비 예술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양평으로 이주해 정착했다고 한다. 양평의 예술가들은 돌덩이에서 이미지를 발견하고, 바람에서도 표정을 읽어냈다. 양평에 산다는 것은 감각을 사는 일이다.
예술인 인적 인프라를 가진 양평군은 2011년 양근리 일대 대지 8069㎡에 지상 3층 규모로 양평군립미술관을 개관했다. 입장료 1000원에 조각가 고정수, 근원 시리즈로 유명한 한국화가 이상찬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두 사람 다 양평에서 10년 이상 거주하며 소통한 원로 작가들이다. 이우환, 이응노, 유영국 등의 작품도 종종 전시된다.
이곳만으로 아쉽다면 양평 지평면 해바라기 마을에 있는 ‘이재효 갤러리’도 괜찮다. 나무와 돌의 작가로 유명한 그의 작품들로 꾸며진 갤러리는 돌이 모빌처럼 매달린 입구부터 이국적이다. 스페인 남부의 한 저택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방탄소년단 RM이 방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곳 티켓값에는 음료가 포함돼 있다. 갤러리 2층, 이 작가 작품들로 가득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해바라기 마을을 바라보는 풍경도 소담하다. 갤러리 곳곳에서 모과 말리는 풍경도 정겹다.
◇북한강이 보이는 ‘수수카페’
치유와 영감을 위한 ‘멍 때리기’ 중 가장 으뜸은 ‘물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양평군 양서면에 있는 ‘수수카페’로 가보자. 밥보다 커피를 더 많이 마신다는 김 감독이 양평 일대 카페 중 경치로는 최고로 꼽은 곳이다.
양평에서도 외딴 논밭에 있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억새와 잡초 뒤로 북한강이 보이는 곳. 양평의 대표 관광지 ‘두물머리’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김 감독은 종종 카페에서 대본을 썼다고 했다. 백색소음은 집중과 안정을 동시에 준다. 그 외에도 봉준호 등 많은 감독들이 카페 작업을 선호한다.
따뜻한 카푸치노를 주문해 강변 앞 소파에 앉았다. 저녁 강바람에 억새가 하늘거린다. 그 사이로 저녁노을로 물든 황금빛 하늘이 환히 열린다. 강바람이 강해지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실내로 들어가지 않는다. 순간 저녁 햇살에 강물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태양은 어느새 강물 속으로 숨어 버렸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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