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 소생으로 태어난 광해군은 총명했지만 감당해야할 현실은 가혹했습니다. ‘대북파’라는 정치기반도 약했고, 왕좌를 위해선 선조, 영창대군, 임해군, 명나라까지도 적이었기에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은 광해군과 북인에게 기회였습니다. 집권한 광해군과 북인들에게 역사적 과제는 국가를 재건하는 것입니다. 7년의 전쟁으로 황폐된 나라를 복구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긍휼애민 矜恤愛民) 구제하기위해서는, 성리학적 명분을 벗어던지고, 실리를 찾아 개혁정치를 펼쳐야만 했는데요. 우리에게 익숙한 허준의 <동의보감> 또한, 전쟁후 창궐하는 전염병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프로젝트였습니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여진족의 후금(청나라)이 성장하고, 명의 쇠락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중립외교를 주장하며 실리외교를 취했는데, 사대주의, 유교와 성리학에 중독된 신하들은 대책도 없이 숭명주의(명나라 편)에 빠져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개혁정치와 합리적 중립외교정책은 조선을 지켜낸 훌륭한 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쟁 후에 경제상황도 최악이어서, 당시 공물(貢物, 지방의 특산물)이 부족했던 농민은 상인들이 납세를 대신하여 몇배의 대가를 받아가는 방납의 피해로 힘들었습니다. 백성들의 부담은 늘어났고, 국가수입은 악화됬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간에서 납세를 관리하는 관리자와 상인들만 이익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은 ‘선혜청’을 두어 공물(貢物, 지방의 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하는 납세제도, ‘대동법’을 실시하였습니다.
대표적 민생법안으로 국가재정을 강화시키고, 백성부담을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토지를 많이 가졌던 양반이나 관리자에게는 부담이 늘어났기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고, 백성들에게 더 악랄하게 착취하기까지도 했습니다.
하지만, 왕권을 강화하고, ‘북인’ 일당독재구축에만 빠져 소모적인 명분론에 쉽쌓였다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는 역풍을 맞게 되는데요.
임진왜란 이후 나라를 굳건하게하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틀을 갖추었지만, 서인에게도 쿠테타의 명분을 주었던 것입니다.
광해군은 오래동안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임진왜란을 비롯 왜군과 여러 전투를 벌였기에, 태조할아버지만큼 건강한 체력을 지녔습니다.
명나라와 후금사이의 중립외교를 한 군주로 강한 이미지로 여겨질 수 있지만, 실은 소심하고, 걱정많은 보통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왕좌를 위해 형과 동생까지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킨 자책과 공포로 현대인의 불안장애(Anxiety syndrome)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의 불안장애는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않고서는 목표에 도달할수 없다)’라 호소할 정도였는데요. 화증(火症)이 심하여 안질(眼疾)에 시각장애까지 겪었고, 체중이 감소되고, 입냄새로까지 힘들었습니다.
즉위 초부터 소화기가 편치않아 죽을 즐겨 먹었는데, 영의정 이덕형에게는 “어려서부터 몸에 열이 많고, 이것이 쌓여 화증이 되었다. 항시 울열증(鬱熱症)을 앓고 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음식섭취를 제대로 못하니, 불면증에도 시달리는데, 인목대비는 “왕이 하루에 두 끼밖엔 먹지 못하고, 그나마 한두 수저에 그친다. 수면도 서너 시간밖엔 취하지 못한다.”며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한의학에서 울열증(鬱熱症)과 눈의 질환은 간의 기능과 연관되어 해석하는데, 그의 마음의 고통이 심각함을 이해시켜주는 대목입니다.
<동의보감>에는 “간(肝)의 화(火)는 피를 뜨겁게 하여, 기(氣)가 위로 치솟고, 혈맥의 통행을 방해한다. 간(肝)의 열(熱)을 내리면 오장이 안정되어 눈의 증상이 호전된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광해군의 외로움, 분노, 답답증이 더욱이 심해져서, 10년(1618년6월17일)에는 “내가 평소부터 화증(火症)이 많은데, 요즈음 상소와 차자가 번잡하게 올라온다. 광증(狂症)이 더욱 심해져 살펴볼 수가 없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명의‘허준보유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적자콤플렉스에 몸과 마음이 괴로워, 무당과 여색에 빠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실록>에 의하면, "복동이 저주를 한 것 때문에 국문을 당하였는데, 궁에 들어가 저주한 물건을 파내고 기도를 하기에 이르러 오히려 왕에게 총애를 받았다. … 왕이 그에게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상을 내리니 한 달 남짓 만에 권세가 조야(朝野)를 흔들었다.”고 전합니다.
결국, 그는 평생을 붕당(朋黨 서인과 북인사이에 벌어진 정치적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타깝게도 삶이 송두리째 희생될 수밖엔 없었습니다.
항상 불안한 왕좌와 국가안위로 불안증의 고통에 산 비운의 광해군이었지만, 왕좌를 내려놓은 후에는 평안을 찾을 수 있었나 봅니다.
유배지 제주도에서 67세에 노환으로 쓸쓸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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