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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모던 경성]梨專 글리클럽은 왜 기생취급받으며 ‘방아타령’을 불렀을까

by 까망잉크 2023. 2. 26.

[모던 경성]梨專 글리클럽은 왜 기생취급받으며 ‘방아타령’을 불렀을까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28년 테너 안기영 부임,민요합창곡집·음반 취입

입력 2023.02.25 06:00
이화여전 음악과 학생들로 이뤄진 합창단 '글리클럽'은 1932년 12월 南鮮 순회 공연에 나섰다.사진은 23일 군산 공연중인 글리클럽합창단. 무릎 부근까지 내려오는 흰 치마와 저고리 차림에 검정 구두를 신은 신여성들의 합창단 공연은 그 자체가 볼 거리였다. 이날 프로그램엔 '놀량' '타령' 등 민요를 합창으로 편곡한 내용이 포함됐다. 신문은 조선의 고악(古樂)을 현대화하기 위한 노력이 청중들에게 자극을 줬다고 평가했다. 조선일보 1932년 12월28일자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주최와 본사 학예부 후원의 이화 추기(秋期)음악회는 예정과 같이 일기 청쾌하고 월색 명랑한 성추(盛秋)의 좋은 절후를 기약하야 지난 26일 오후8시부터 장곡천정(長谷川町)공회당에서 열렸다. 이화학교는 일찍이 조선 악계에 끼친 바 공헌이 많을 뿐아니라 실로 악단에 패권을 잡은 그만큼 만도(滿都)의 인기는 여기 집중되야 정각전부터 서양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 조선사람 할 것없이 과연 국제적으로 떼를 지어 모여들어 장내는 삽시간에 대만원을 이뤘다.’(‘대성황 이룬 이화여전음악회’,조선일보 1928년 10월28일)

◇이화여전 합창단의 ‘방아타령

최고 엘리트 여성 교육 기관인 이화여전 학생들이 출연한 연주회가 열렸다. 공연장은 해외 연주자들이 내한공연할 때마다 단골로 찾는 경성공회당이었다. 1920년 건립된 경성공회당은 지금의 소공동 조선호텔 건너편에 있었다. 입장료는 1원50전, 1원, 학생은 50전이었다. 설렁탕 한그릇에 10전쯤 하던 시절이니 꽤 비싼 편이었다.

이날 공연엔 바이올린 독주, 피아노 2중주, 성악과 함께 이화여전 ‘글리클럽’ 합창이 포함됐다. 글리클럽(Glee Club)은 대학 또는 고교 합창단을 가리킨다. 이전(梨專) 글리클럽은 당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합창단이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흰색 치마와 저고리에 검은 색 구두 차림으로 당대 유행을 주도한 ‘패셔니스타’였던 이화여전생들이 부르는 합창은 그 자체가 볼 거리였다. 그런데 이날 레퍼토리중 눈길을 끄는 곡이 있었다. 전통 민요 ‘방아타령’이 포함된 것이다.

기독교계 학교인 이화는 학당시절부터 음악교육과 합창 훈련에 공을 들였다. 이화합창대는 종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성가와 서양음악을 주로 불렀다. 선교사들이 찬송가를 가르치고 함께 노래하면서 시작된 전통이었다. “음악은 순수해요. 베토벤 음악을 들을 때 거룩한 공간에 있다고 느껴요. 종교 음악을 배울 수있어서 기뻐요. 슈베르트 음악을 좋아해요.”(김은영, ‘이화여전 글리클럽연구: 1927~1935년의 활동을 중심으로’ 116쪽, 이화음악논집)

만문만화가 안석주가 그린 안기영 캐리커처. 항상 연미복을 입고 공연한다고 썼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1928년 이화여전 교수로 취임한 안기영은 전통 민요를 합창곡으로 편곡한 악보집을 내고 글리클럽 음반 출반을 이끈 주역이었다. 조선일보 1931년 2월17일자

◇민요합창 레코드까지 취입

이런 분위기의 이화합창대가 ‘세속적’ ‘토속적’이라할 ‘방아타령’을 부른 건 사건이었다. 글리클럽은 내친 김에 민요 레코드 취입까지 나선다. 1929년 4월 ‘이팔청춘가/도라지타령’ ‘방아타령’을 발매한 데 이어, 1931년 1월 ‘양산도’, ‘농부가’, 그해 9월엔 ‘한양의 봄’, ‘자진산타령’까지 발매했다. 이화여전 음악과에서 출간한 ‘조선민요합창곡집’제1집(1931년5월)에 수록된 곡 7개 전부를 음반으로 냈다. 저작 겸 발행인은 음악과장인 메리 영(美理英)이었다. 안기영이 편곡한 작품은 ‘자진산타령’ ‘농부가’ ‘한양의 봄’ ‘양산도’ 등 4곡이었고, 메리 영이 ‘도라지타령’ ‘이팔청춘가’ ‘방아타령’ 3곡을 편곡했다. 음반은 모두 콜럼비아 레코드회사에서 나왔다.

음악학자 김은영에 따르면, ‘글리클럽’이 민요를 공연하게 된 데는 선교사들의 의식 변화와 관련 있다. 일부 선교사들은 효과적 선교를 위해선 한국인의 음악적 감수성을 이해하고, 전통 음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제가 민요 수집에 나서면서 지식인들이 서구 중심적 창가 교육을 비판하고 민요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영향을 줬다. 1928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테너 안기영이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가 되면서 변화의 속도가 빨라졌다. 1930년 이전 음악과 교과과정엔 성악 전공 학생들을 중심으로 ‘글리클럽’(합창단)이 신설됐고, ‘동양음악’ 수업이 성악과 교과목으로 편성됐다.

1928년 10월24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이전음악회. 글리클럽 합창단이 민요 '방아타령'을 불러 눈길을 끌었다. 조선일보 1928년 10월28일자

◇'신여성의 조선 노래는 흥미만점’

 

‘글리클럽’은 매년 정기 순회 연주회를 다녔다. 1930년 12월27일 오후 7시 평양 백선행기념관 공연에는 1500명이 몰렸다. ‘방아타령’ ‘도라지’ ‘농부가’를 불렀는데, ‘신여성의 조선노래는 실로 흥미만점’이란 기대에 맞게 ‘조선 사람은 결국 조선 민족 고유의 예술이 보다 더 아름답다’(‘梨專순회음악’, 동아일보 1930년 12월29일)는 평가를 받았다. 26일 진남포 공연에서 청중들이 앙코르 요청을 너덧차례나 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1932년12월22일부터 29일·30일까지 이리, 군산, 전주, 광주, 목포와 대구, 부산 등 주로 남부 지방을 훑었다. ‘이화전문학교 음악과에서는 연전(年前) 동기(冬期)에도 합창단을 조직하고 사조선(四朝鮮)방면을 순회하야 일반에 많은 음악열을 고취한 바 있었는데, 금반 동기 휴가를 이용하야 다시 합창력을 조직하고 동교 교수 안기영(安基永)씨의 지휘하에 남조선을 순회하게 되었다.’(‘梨專합창단 南鮮순회’, 조선일보 1932년12월18일) 당시 합창 프로그램에도 ‘놀량’(경기 또는 서도 산타령의 첫째곡)과 ‘타령’을 편곡한 민요가 들어있다. 민요가 포함된 글리클럽 공연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23일 군산 조산극장에서 올린 공연에 대해 ‘여자의 최고 학부로서 조선의 고악(古樂)을 시대화시키기 위해서 특별히 연구한 결과 모든 것이 의의 심장하야 뜻있는 방청자에게 자극을 주었’(‘梨專巡回合唱團 군산에서 성황’, 조선일보 1932년 12월28일)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상투 있는 신사가 양복 입은 격’

하지만 기독교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미션스쿨인 이화여전 학생들이 속된 민요를 부르는 모습이 기생을 연상시킨다며 난리를 쳤다. 당시 교회는 민요나 전통 문화를 저속하고 불순하게 여기는 서구 우월주의적 시각이 강했다. 그런데 여학생들이 민요를 부르며 순회공연하는 것도 모자라 음반까지 냈으니 반발했던 것이다.

음악계도 끓어올랐다. 조선 민요를 오선지 악보에 옮긴 데 대한 반발이 컸다. ‘조선 민요는 서양음악 기보법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으며 조선의 민요곡을 3부 또는 4부합창으로 노래한다면 마치 상투 있는 신사가 양복 입은 격’(‘이전 음악과 간행 민요합창곡집’, 조선일보 1931년 8월10일) 이라는 비판이었다. 이상준(1884~1948)은 ‘조선민요합창곡집’제1권이 자기가 채보한 민요 악보와 가사를 무단으로 사용했다면서 저작권 소송까지 제기했다. 안기영의 양악화 시도에 대한 거부감때문이었다.

◇1935년 이후 서양음악 중심으로 회귀

1935년 이후 이화여전 글리클럽의 레퍼토리는 다시 민요 대신 서양 음악의 비중이 높아진다. 메리 영 대신 데머른, 윤성덕 등 새로운 교수들이 글리클럽을 지도하면서 전통적인 서양 합창음악 레퍼토리로 돌아간 것이다. 음악학자 김은영은 ‘이화여전에서 한국 전통음악을 수용, 접목시킨 선진적이고 가치있는 시도와 노력이 중단 또는 폐기되지 않고 지속되었더라면 한국 전통음악의 현대화 및 세계화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한국 전통음악의 교회음악과의 접목이 중단 없이 이루어졌더라면 오늘날 한국 교회 음악은 더욱 다양하고 토착화된 형태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충분히 공감가는 지적이다.

◇참고자료

김은영, ‘이화여전 클리클럽연구: 1927~1935년의 활동을 중심으로’ , 이화음악논집 제23집 제1호, 2019.3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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