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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지식카페]왕들이 가장 성가시게 여긴 관청… 붕당정치땐 권력·당파에 이용당해[

by 까망잉크 2023. 3. 4.

왕들이 가장 성가시게 여긴 관청… 붕당정치땐 권력·당파에 이용당해[지식카페]

입력2023.03.03. 오전 9:04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지식카페- 박영규의 조선 궁권 사람들 - (16) 간쟁 관장하는 사간원

임금의 결함 지적하고 그릇된 정치나 관리들 잘못 꾸짖어… 사헌부와 더불어 ‘언론양사’ 불려

근무중 술 마셔도 징계 안받고 막강한 권한 휘둘러… 他 관청에 인심잃고, 왕이 투옥·파직시키기도

사간원(司諫院)은 임금의 결함을 지적하고, 그릇된 정치나 관리들의 잘못을 규탄하는 일을 맡는데, 이런 일을 간쟁(諫爭)이라고 한다. 간쟁에는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어떤 사실을 간접적으로 비유하는 것을 풍간이라고 하고, 임금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도록 말을 순화시켜 하는 것을 순간, 정면으로 사실 그대로 간하는 것을 직간, 시비를 가려서 임금이 행할 것을 강요하는 쟁간,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간하는 함간이 있다. 이 다섯 가지 간쟁 중 가장 바람직하게 여겼던 것은 풍간이었다고 한다.

사간원의 ‘간(諫) 자’가 ‘아뢸 간’ ‘충고할 간’이라는 게 이 기관의 성격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사헌부와 더불어 언론양사(言論兩司)라고 하였고, 왕의 정치적, 학문적 물음에 답했던 홍문관을 보태어 언론 삼사라고 하였다. 이 언론 삼사는 가장 청렴한 관리만 근무한다는 청요직의 대명사였는데, 사간원은 언론 삼사 중에서도 오직 언론 기능인 간쟁만 담당했기 때문에 대개 간관이라고 했다. 이들의 기능이 임금에게 간언하는 것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사헌부와 달리 사간원은 궁궐 안에 있었다.

사간원은 중국 진한시대의 간의대부에서 유래되었다. 이후 당송시대에는 문하성과 중서성에 산기상시, 간의대부, 보궐, 사간, 습유, 정언 등의 관직을 뒀고, 이를 고려가 수입하였던 것이다. 사간원의 관직에 해당하는 직책은 고려시대엔 산기상시, 직문하, 간의대부, 급사중, 중서사인, 문하사인, 기거주, 기거랑, 기거사인, 사간, 보궐, 헌반, 습유, 정언 등의 이름으로 있었다. 그러다 조선에 와서는 고려의 문하부 낭사의 제도를 계승하여 유지되다가 문하부가 사라지고 의정부가 설치될 때 문하부 낭사는 독립되어 사간원이 되었다.

사간원의 관리는 정3품 당상관인 대사간 1인과 종3품 사간 1인, 정5품 헌납 1인, 정6품 정언 2명 등 총 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관원은 사헌부의 관원들과 함께 대간(臺諫)으로 불렸다. 사간원이 비록 사헌부와 함께 대간 또는 언론양사로 불렸지만, 두 기관의 근무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사헌부가 엄격한 상하 관계를 유지하며 조직의 기강을 중시하는 곳이었다면 사간원은 상하 관계가 엄격하지 않았고, 근무 분위기도 자유로웠다. 심지어 사간원의 관원은 근무 중에 술을 먹어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 또한 금위군이라고 하더라도 사간원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고, 사간원의 관원이 잘못을 했더라도 사간원 안으로 도망치면 잡을 수 없었다.

그만큼 자신의 행동과 말에 대한 책임이 큰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종의 특별대우를 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조 이후 붕당 정치가 시행되면서 사간원의 관원은 권력이나 당파에 이용되는 사례가 많았다. 그 때문에 때로는 왕으로부터 압박을 받아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사실, 대다수의 왕은 사간원을 성가시게 생각했다. 그래서 연산군 같은 폭군은 사간원을 아예 없애버리기도 했다. 또 사간원의 간관도 계속해서 줄였다. 고려 시대엔 간관이 13명이었는데 조선에 와서는 7명으로 줄였고, 이후에도 좌우 사간대부가 2명이었으나 대사간 1명으로 줄였다. 헌납도 2명이었으나 1명으로 줄여 결국 사간원 관원 수는 5명으로 축소되었다.

이렇듯 사간원은 관원이 몇 명 되지 않는 소규모 관청이었지만, 언론기관으로서 사간원의 기능은 상당히 폭이 넓고도 중요했다.

첫째는 임금의 잘못에 대한 간쟁과 비리를 저지른 관원들에 대한 탄핵, 잘못된 정치에 대한 시정과 부당한 인사에 대한 경고 등 언론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이 주요한 임무였다.

둘째는 중요한 정치기관의 하나로서, 사간원의 관원은 왕이 중신들을 접견하거나 보고와 조언을 받는 자리에 참여하였고 의정부, 육조와 함께 정치와 입법에 관한 논의에 참여하였다.

셋째는 왕을 모시는 역할이다. 승정원이라는 비서실이 있었음에도 사간원은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왕이 경서를 배우는 경연에 같이 참석하였고, 세자를 교육하는 자리인 서연에도 참석하였다. 또한 왕의 행차에는 어디든 반드시 따라다녔다. 이 밖에도 관리들의 인사나 상벌을 주는 일에 관여하여 비리나 부정이 없도록 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렇듯 사간원의 기능이 광범위하고도 막강했기에 관원이 되는 자격 또한 매우 까다로웠다. 자기 자신은 물론 4대에 걸쳐 죄지은 바가 없는 집안의 인물이어야 했고,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은 선비여야 했다. 사간원은 다른 관리들의 잘못을 비판하고 때로는 왕의 잘못도 거침없이 지적해야 하는 자리였기에, 다른 관청의 관료들에게는 인심을 잃기에 충분했고, 때론 왕의 분노를 사서 옥에 갇히거나 파직되는 일도 많았다.

태종 시절에는 궁실을 확장하려는 것을 좌사간 윤사수가 반대하자, 태종은 그를 순군옥에 가둬버리기도 했다. 이후 태종은 윤사수를 풀어줬지만, 그 뒤로도 성가신 일이 잦자 사헌부와의 마찰을 이용하여 윤사수는 물론이고 그 밑에 있던 사간원 관원들을 모두 교체하기까지 했다.

그 일의 시작은 당시 사간원과 사헌부의 힘 대결에서 비롯되었다. 태종 1년(1401년) 11월 23일의 일이다. 사헌부가 사간원 관원들을 탄핵하며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사간 윤사수 등은 간신(諫臣·간언을 맡은 신하)으로서 미륵사 등에 모여서 창기를 불러 밤새도록 놀고 술을 마셨으니 마땅히 죄에 처하여야 합니다.”

사헌부가 임금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 자신들이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당할까 봐 선수를 친 것이었다. 당시 사헌부 관원들이 흥국사에 모여 놀았는데, 사간원에서 이를 알고 사간원 사령들을 시켜 흥국사를 몰래 감시했다. 그런데 이를 눈치챈 사헌부에서 먼저 사간원을 공격한 것이다. 사실, 사간원 역시 미륵사 등 여러 곳에 모여 술을 먹고 논 적이 있는데, 사헌부 역시 이를 감찰하고 있다가 사간원에서 사헌부를 탄핵할 기미가 보이자 선수를 친 셈이다.

이때 사헌부에 의해 탄핵된 관리는 사간 윤사수와 김첨, 지사간 성발도, 헌납 권훈, 정언 정안지와 한고 등 사간원 관원 6명이었다. 당시 사간원 관원이 총 7명이었으나, 사헌부에서는 그들 여섯 명이 전부인 줄 알고 탄핵상소문에 그들의 이름만 올렸다. 그런데 사헌부에서 탄핵하지 못한 한 명이 남아 있었는데, 그가 곧 사간원 헌납 한승안이었다. 당시 한승안은 개인적인 이유로 출근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사헌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편, 한승안은 사헌부가 사간원 관원 전체를 탄핵했다는 말을 듣고 곧 출근하여 사헌부 관원들을 탄핵했다. 한승안이 탄핵한 사헌부 관원들은 대사헌 이지를 비롯, 장령 박고와 이반, 지평 김치와 송흥 등으로 사헌부 수뇌부 전부였다. 한승안의 탄핵을 받은 사헌부에서는 자신들이 탄핵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어리둥절하며 말했다.

“사간원 관원은 죄다 탄핵했는데, 누가 우리를 탄핵했단 말인가?”

그들은 한승안의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자신들의 탄핵 상소문에 한승안의 이름이 빠졌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런데 정작 사헌부에 대한 한승안의 탄핵상소를 받은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헌사(憲司)가 죄가 있으면 곧 탄핵하여 죄주기를 청하는 것이 가한데, 지금 헌사의 탄핵을 당한 연후에 죄주기를 청하니 늦었다.”

말인즉, 사헌부가 사간원을 탄핵한 것이 먼저이니, 우선 사헌부의 탄핵상소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승안의 탄핵을 사헌부에 대한 보복성 탄핵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태종은 한승안이 사헌부의 탄핵에 죄를 승복하지 않고 도리어 사헌부를 탄핵한 죄를 물어 한승안을 파직해버렸다. 이렇게 사간원과 사헌부의 힘 싸움은 사헌부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는 태종이 사헌부 편을 든 결과였다. 당시 태종은 윤사수가 이끌던 사간원을 몹시 귀찮게 여기고 있었는데, 사헌부와의 다툼이 있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사간원 관원들을 모두 교체해버린 것이다. 이렇듯 사간원은 다른 관청과 곧잘 힘 싸움을 벌여야 했는데, 특히 함께 사정기관의 임무를 맡고 있던 사헌부와 대립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고, 왕은 그들의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성가신 사간원 관원들을 교체하곤 했던 것이다.

작가

■ 용어설명 - 사헌부

중국 어사대(御史臺)에서 유래해 고려 시대에 처음 설립된 관청으로 감찰 행정을 담당했다.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은 조선 시대엔 부정을 적발해 법적 조치를 취하는 사법권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형조·한성부와 더불어 삼법사(三法司) 또는 출금삼아문(出禁三衙門)이라고도 불렀다. 아울러 임금이 임명한 관원에 대한 동의 여부를 결정하는 기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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