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어느 아버지의 초상
입력 2023.03.04 00:24
‘金順喆(김순철)’, 2016년. ⓒ 김희진
1932년부터 2015년까지 대한민국을 살다 간 한 남자가 있다. 이름 김순철.
고향이 평안북도 구성인 그는 열다섯 살에 홀로 삼팔선을 넘었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생계를 위해 안 해 본 일 없는 청장년기를 보냈고 마흔이 되어서야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몇 번인가 사업 실패로 고전했지만 가족에게는 내색치 않았다. 그는 돌도 안 된 아들에게 세발자전거를 선물했고, 대학 가는 딸들에게는 데모하지 말라 당부했다. ‘이제 좀 살만해졌을 때’ 노환과 함께 알츠하이머가 찾아왔다. 생애 마지막 날, 그의 한마디는 ‘아버지가 부족해서 미안하다…’였다.
사진가 김희진은 그런 김순철씨의 여식이다. 사진 시리즈 ‘金順喆(김순철)’은 딸이 그 아버지의 생애를 찍고 기록한 것이다. 김희진은, 홀로 삼팔선을 넘는 어린 아버지의 등 뒤에서 사진을 찍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함께 있었다. 문 닫은 회사를 뒤로하고 귀가하는 아버지의 걸음도, 기억이 지워져 가는 늙은 아버지의 시선도 찍었다.
그 기록들이 ‘金順喆’이라는 제목의 전시와 사진집으로 묶였지만, 사진 어디에도 김순철은 없다. 차도와 인도의 경계에 주저앉은 취객의 뒷모습, 버려진 시계, 신문지가 덮인 배달 쟁반, 날아가는 연…모두 보아도, 김순철씨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김순철은 ‘있다’. 00540080, 3211151334919, 0185407 등 사진 옆에 적힌 숫자들이 엄연히 존재했던 김순철씨의 환자번호, 주민등록번호, 군번, 납골당번호이듯이, 각각의 사진들은 모두 김순철씨의 고단했던 삶의 단편들과 감정들을 은유하고 묘사하고 상징함으로써 그를 호명한다. 사진가 딸은 이미 지나간 시간과 사라진 존재를 현존하는 상황과 사물로 치환하는 방식을 통해 아버지를 기억하고 기록한 것이다.
더 나아가 ‘金順喆’은 김순철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로 대변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도 확장된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쟁의 상처와 유신, 민주화 항쟁 등…. 대한민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했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정하기엔 역부족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김순철들의 초상인 것이다. 사진의 경계를 허물고 확장한 사진가 김희진에 대한 놀라움이 여기에 있다.
중앙 썬데이
박미경 류가헌 관장
[사진의 기억] 어머니, 당신 손에 이만큼 컸습니다
입력 2023.02.11 00:24
‘엄마손’, 경기도 김포, 1978년. ⓒ김녕만
바람 부는 거리에서 좌판을 펼치고 밤을 구워 파는 노점상 아주머니가 잠이 든 품속의 아이가 추울세라 한 손으로 바람막이를 해 주고 있었다. 이 추운 거리로 아이를 데리고 나온 걸 보면 딱히 맡길 데가 마땅치 않아서였을 터. 그러나 안쓰러워하는 엄마의 조바심과 달리 아이는 아주 곤하게 잠이 들었고 엄마는 조금이라도 아이의 얼굴에 찬바람이 가지 않도록 손바닥 이불을 덮어 주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하여 셔터를 눌렀다.
누구나 엄마의 손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에 배 아프다고 칭얼대면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되뇌시며 슬슬 배를 문질러 주셨고, 그 소리에 어느새 스르르 잠이 쏟아졌다. 시장기가 돌 때 뭔가 주물럭주물럭하시면 개떡이든 수제비든 먹을거리가 나타나던 요술 같은 엄마 손. 엄마의 손을 잡고 시장에 갈 때 날아갈 듯 행복했던 기분. 그리고 서울에서 고학하는 아들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 떠 놓고 빌었던 어머니의 정성스런 두 손.
엄마의 손에 눈길이 머문 것은 이런 기억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얗고 고운 아이의 피부와 대조적으로 엄마 손은 거칠거칠하고 손톱은 짧게 마모되었다. 엄마의 삶이 어떠했는지 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손은 이렇게 한 사람의 지나온 삶을 압축하고 있어서인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는 손으로 대표하는 표현이 많다.
일할 ‘사람’이 없을 때 일‘손’이 없다 하고, 어떤 일에 미리 개입했을 때 선수(先手)를 쳤다고, 즉 손을 썼다고 말한다. 포기하면 손을 뗀 것이고 손잡았다 함은 일을 함께 도모함이며, 손이 너무 많이 가는 일을 하다 보면 결국 지쳐서 손을 들게 되기도 한다. 괘씸하면 손봐 주고 싶고, 통이 큰 씀씀이를 손이 크다고 말한다. 일상에서 손이 의미하는 바가 다양함은 손을 통해 많은 것을 읽을 수 있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굳이 엄마의 얼굴표정을 보지 않아도 엄마의 손을 통하여 애틋하고 지극한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김녕만 사진가
중앙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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