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다큐] 61년차 가위손의 노래
입력 :2015-05-31 17:48ㅣ 수정 : 2015-05-31 20:33
최초·최고령 여성 이발사 이덕훈 할머니의 명랑일기
“사각사각 사르르 삭삭….”
“머리카락이 다듬어지는 이 소리를 들어 봐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 머리를 아름답게 다듬어 줘’라고 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이 소리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가위를 놓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 사각사각
이덕훈 할머니가 61년 경력의 이발 솜씨로 단골손님의 머리카락을 다듬고 있다.
▲ 사악사악
이덕훈 할머니가 정성스럽게 면도를 하고 있다.
▲ 뽀득뽀득
미용실과 다르게 숙이고 하는 머리 감기.
▲ 꾸욱꾸욱
마사지는 단골손님에게만 해 주는 특별 서비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이발사이자 61년 동안이나 서울 성북동 ‘새이용원’에서 이발사의 길을 걷고 있는 이덕훈(81) 할머니.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숙달된 손놀림으로 머리를 깎고 있다.
40년 넘은 단골손님 우덕수(80)씨가 한마디 거든다.
“내가 이발비 300원일 때부터 지금까지 단골입니다. 이렇게 두상에 맞게 머리가 난 대로 잘라 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단골손님의 이발이 끝나자 이번엔 취재 온 기자의 머리를 보더니 의자에 앉아 보라고 한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목엔 보자기가 쳐졌고 할머니는 이발을 시작한다. 손놀림이 섬세하고 정확하다.
“머리카락은 이렇게 잘라야 어느 쪽으로 넘겨도 결이 살지요.”
이발을 마쳤나 보다 싶었는데 이번엔 사흘이나 면도를 못 한 내 수염을 보더니 의자를 뒤로 젖히고 수건을 두르더니 면도를 시작한다. 난생처음 내 수염이 다른 사람에게 깎여지는 순간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팔과 어깨 손가락 안마를 시작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카메라를 반평생 메고 다닌 직업병으로 굳은 근육을 정확히 짚는다.
▲ 이용원에서 사용하는 이발 도구들. 부친이 사용하던 바리캉, 40년을 사용한 면도칼 등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 1962년 발급된 이용사 면허증.
‘새이용원’에는 가격표가 있긴 하지만 의미가 없다. 이발, 샴푸, 면도, 귀지 청소에 때로는 간단한 마사지까지 해주고도 1만원이면 충분하다. 단골손님이나 노인,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형편에 따라 비용이 달라진다.
할머니는 손님의 머리뿐만 아니라 건강과 집안일까지 챙긴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가 집에 안 가고 계속 이용원에 찾아오기도 했다. 35년 단골손님이 파킨슨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성가를 두 시간 동안 불러 주기도 했다. 몇 달 뒤 돌아가신 뒤에는 할머니가 찾아가 위로하고 눈을 감기니 비로소 눈이 감겼다고 한다.
▲ 이덕훈 할머니가 밝은 미소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명랑 이발사로 통한다. 늘 웃고 쾌활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고난했다. 아버지를 따라 일곱 살 때 북만주에서 생활했고, 아들 넷을 어렵게 키웠다. 가난해 물조차 부족했던 시절에는 빨래터에서 길어 온 물로 큰아들부터 넷째까지 세수시키고 발을 씻기고 걸레를 빤 뒤 기르는 호박에 물을 주었다고 했다.
사람 좋고 인물까지 출중했던 남편은 교통사고를 당해 200일 넘게 간병했지만 2004년 1월 결국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도 45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져야만 했다.
고난이 할머니를 시인으로 만들었나 보다. 남편 간병 시절부터 인생의 흔적을 기록한 노트가 여러 권이다.
‘새이용원’엔 온통 ‘헌 물건’이다.
이발사였던 아버지(고 이봉휘) 때부터 쓰던 100여년 된 ‘바리캉’. 독일제 면도칼은 38년, 국산 가위 한 자루는 40년, 한 자루는 30년 됐다. 고운 사포로 직접 갈아 쓰는 가위는 오래된 것일수록 가윗날이 날씬하다. 머리 감길 때 쓰는 물뿌리개도 20년은 넘었다. 오며 가며 들르는 손님들도 해묵은 단골이다.
“남한테 손 벌리지 않았고 정직하게 살았어요. 그래서 당당하게 살 수 있었지요. 힘든 날들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답니다.”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한 할머니 눈가가 어느덧 촉촉해진다.
할머니는 대한민국 최고령 여성 이발사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90살에도 가위를 잡을 거라고 말한다.
진정 좋아하는 일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응원을 보낸다.
글 사진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2015-06-01 20면
서울신문
가위,이용원,사악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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