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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유배를 가다 (10)

by 까망잉크 2023. 3. 17.

유배를 가다 (10)

훗날 사관들은 이때 유자광과 임사홍이 참형을 면하게 되어 한탄했다

by두류산Dec 15. 2022

 

 10장

 이심원은 종실의 잘못을 규찰하는 임무를 관장하는 종부시에 출두하여 심문을 받았다. 종부시 제조 밀성군이 고발한 사건이므로, 종부시 관원은 이심원을 대놓고 죄인 취급을 하였다.  

 “부친이 병환 중인데 아들의 도리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아픈 부친 곁에서 약탕을 끓여서 정성껏 올려야 하거늘, 책을 읽은 사람이 어떻게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단 말이오?”

 강상죄는 조선시대 윤리인 삼강오상(三綱五常)을 범한 죄를 말한다. 삼강오상은 부자, 군신, 부부, 형제, 친구 간의 윤리를 뜻하나, 대개 자식이 부모를 살해 혹은 폭행하는 등의 하극상이나 불효 죄를 다루는데 강상죄를 적용하여 엄하게 처벌하였다.

 

 심문하는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누가 이런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인가?’

 이심원은 임원준과 가까이 지내는 종부시 제조인 밀성군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단정할 수는 없었다. 이심원은 목소리를 높여 반박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오. 부친이 중풍이 들어 아침과 저녁으로 분주히 오가며 살펴보고 있소. 의원과도 매일 약을 어떻게 쓸 것인지 의논하고 있는데 어디서 이런 허망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오?”

 

 관원이 우물쭈물 답하지 않자, 이심원이 다시 물었다.

 “하나 묻겠소. 나의 부친이 내가 불효했다고 고발한 것이오? 아니면 고발한 사람을 알려주시오.”

 “부친이 고발하지는 않았으나, 누가 고발한 지는 밝힐 수 없소.”

 

 이심원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불효에 대한 죄는 피해자가 직접 고소해야 비로소 죄가 되는 것이오. 부친이 고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로 나를 심문하시오? 불순한 자가 종친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종부시가 이렇게 거들어도 되는 것이오?”

 관원은 할 말이 없어, 더듬더듬 말을 꺼내었다.  

 "종친이 사사로이 남효온 같은 무뢰한 유생과 어떻게 친분을 맺게 된 것이오?”

 “종친은 이 나라의 선비들과 사귐을 나누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이오?”

 

 이심원은 어찌하여 자신이 이곳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것인지 대개 짐작이 갔다.

 ‘임사홍과 임원준을 탄핵하였기에 밀성군 집에 기거하고 있는 현숙 공주가 앙심을 품고 종부시 제조인 밀성군에게 청을 올린 것이다.'

 이심원은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심원은 종부시를 나와 바로 궁궐을 찾았다. 승정원에 들어가, 승지에게 임금을 알현시켜달라고 청했다. 승지들은 이심원의 청을 거절했다.

 “사직에 관한 일이 아니라면 알현은 곤란하오. 주상께 드릴 말씀이 있으면 글로 적어주시오. 전해드리리다.”

 이심원은 승지들에게 항의했다.

 “주상전하께 여쭈어 보고 나서 거절해도 늦지 않습니다.”

 

 승지가 임금에게 나아가 물었다.  

 "주계부정 심원이 전하를 알현하고자 하옵니다. 개인적인 일인 듯한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종은 짚이는 것이 있었다.

 "얼마 전에 효령대군과 밀성군이 고모부를 탄핵한 심원을 벌주고 임사홍을 용서하기를 청하였다. 또 심원의 죄를 들어 말하기를, 축수재 폐지와 세조 때의 신하를 쓰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하 된 자의 말이 아니며, 고모부를 탄핵하였으니 이는 인정이 아니며, 병든 아비가 있는데 옆에서 약을 끓어서 올리지 아니하니, 이는 아들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과인이 응답하기를, 바른말을 구하고서 견책하면 어찌 옳겠는가? 아비의 병이 있는데 정성으로 약을 올리지 아니한 것은 종부시에서 국문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심원이 이 때문에 온 것이다. 심원을 들라하라.”

 

 심원은 승지를 따라 어전에 나아가 임금에게 절하고 아뢰었다.

 "신이 친히 아뢰기를, 오늘 임사홍을 탄핵하면 반드시 집안의 죄인이 되고, 조정에서 미워하는 바가 되어 몸을 용납할 바가 없을 것이니 신이 믿는 바는 주상전하의 밝으심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종부시에서 신이 아버지의 병을 시약하지 아니한 것과 남효온과 사귐을 가지고 국문하니, 무릇 불효는 어버이가 친히 고해야만 비로소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조부와 부모가 고하지 아니하고, 이웃이 고하지 아니하고, 고을 수령이 고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것은 오로지 임사홍의 잘못을 탄핵한 까닭으로 인해 신을 모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분하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심원이 자신의 처지를 임금에게 하소연하고 물러가자, 성종은 승정원을 통해 종부시에 명하였다.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골육의 친함이 없다고 하니, 석작(石碏)이 나라를 위해 아들을 죽인 것은 이 때문이다. 심원이 말한 바는 잘못한 것이 아니다. 또 부자간의 일은 진실로 바로 알기 어렵다. 전일에 밀성군이 아버지가 병환 중인데 아들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다고 심원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비록 심원의 아비인 평성도정에게 물을지라도 위로는 보성군의 뜻을 어길 수 없고 아래로는 차마 아들의 허물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문제로 삼지 않는 것이 좋겠다.”

 

 춘추시대 위나라의 충신 석작은 아들이 모반을 일으켜서 성공하자, 지혜로써 아들을 참형에 처하고 왕실을 구하였다. 춘추좌씨전을 지은 좌구명(左丘明)은 역사를 편찬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 이렇게 찬탄하였다.

 “대의멸친(大義滅親, 대의를 위해 골육의 정을 끊음)하였으니, 석작이야말로 참된 신하로다!”

 

 도승지 손순효는 학문과 기개가 높은 김맹성과 표연말이 화를 당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기회를 보아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이 임사홍과 더불어 일찍이 동료가 되었으나, 간사함이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가까이 모시는 자리에 있으면서 대간과 결탁하여 현석규를 공박해 모함하였으니, 바로 죄의 괴수입니다. 하지만 김맹성과 표연말 등은 임사홍의 간사함을 알면서도 즉시 아뢰지 아니한 죄가 있으나, 임사홍에 비하면 죄의 무게가 다르다고 생각되옵니다.”

 "경은 누구의 죄는 가볍고, 누구의 죄가 무겁다고 하는가? 김맹성 등은 간관으로서 결단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간관의 도리를 잃은 것이 아닌가? 또한 표연말은 알고도 과인에게 바로 말하지 않았으니, 죄가 또한 작지 않다.”

 

 손순효가 다시 아뢰었다.

 "김맹성은 처음에는 박효원에게 속은 바가 되었다가, 뒤에 박효원의 간사한 꾀를 깨닫고 의논하여 반격하려고 하였으나, 한때의 동료이기 때문에 마침내 중지하고 실행하지 못하였으니, 그 본래의 의도는 임사홍과 같지 아니합니다.”

 "그렇다. 과연 그러했다. 하지만 그 죄도 가볍지는 않다.”

 

 성종은 조회에 참석하여, 신하들에게 김맹성과 표연말, 김괴의 처벌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김맹성과 표연말, 김괴 등은 임사홍이 박효원에게 은밀히 사주한 것을 알고 질책을 하였으며 또 공박하여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마침내 그렇게 못한 것은 임사홍과 박효원의 술책에 빠져서 그런 것이었다. 그들도 장을 때리는 것을 면제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대간들과 좌우의 신하들이 일제히 대답하였다.

 “지금 죄의 괴수에게 형장(刑杖)을 면제하면, 김맹성과 김괴 등도 마땅히 면제해야 할 것입니다.”

 

 성종은 신하들의 의견이 하나가 되자, 곧바로 명하였다.

 "김맹성과 표연말, 김괴 등도 형장을 면제하라."

 이로서 박효원과 김언신을 제외하고는 현숙 공주가 눈물로 호소한 임사홍과 공신으로 대우한 유자광, 그리고 김맹성과 표연말, 김괴 등은 모두 형장을 면제받았다.

 

 성종 9년 5월 8일, 임사홍과 유자광 등 붕당 죄에 관련된 자의 처벌을 확정하였다. 임사홍을 의주에, 유자광을 동래에, 박효원을 함길도 부령에, 김언신을 강계에 유배하였다. 임사홍은 이심원과 남효온을 붕당이라고 몰았다가 오히려 스스로 붕당 죄를 얻게 되었고, 임사홍이 이심원 등의 공격을 받으면서 일어난 소용돌이에 유자광도 휘말려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심원이 임사홍 부자의 간사함을 밝히려다, 불똥이 튀어 같이 벌을 받게 된 김맹성은 고령에, 김괴는 강진에 도배(徒配, 노역형) 형에 처해졌다. 표연말은 종친 이심원과 사귀어 임사홍의 간사함을 임금에게 먼저 말하지 않고 사사로이 이심원에게 말했다는 죄를 물어 산음(山陰, 지금의 산청)에 도배(徒配) 형에 처해졌다.

 

 사관은 표연말이 이번 일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게 된 것을 아쉬워하였다.

 "표연말은 효행이 뛰어났다. 부모가 죽자 재산을 모두 형제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과거에 올랐으니 주상의 은혜를 입을 것이나, 너희들은 생활이 매우 어려우니 이것을 가지고 살라.’고 하니, 고을 사람들이 칭찬하였는데, 이때에 죄를 얻어 처벌을 받자 사람들이 애석해하였다.”

 

 이심원은 기가 막혔다. 임사홍 부자를 소인으로 고발하여 양관의 관원들을 옥에서 풀려나오게 했으나, 이 때문에 평소에 존경하고 따랐던 김맹성과 표연말이 죄를 얻게 되었다. 집안에서는 고모부를 고발한 인정도 의리도 없는 불한당이 되었고, 할아버지와 대질신문으로 불효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이심원은 경상도 고령과 산음으로 내려가는 김맹성과 표연말을 과천까지 따라갔다. 과천에서 두 사람과 헤어지면서 이심원은 커다란 눈에서 눈물을 뚝뚝 쏟아내었다.  

 

 성종 9년 무술년 5월의 옥사(獄事)는 훗날 무술옥사(戊戌獄事)라고 불리었다. 20년 후, 1498년 무오(戊午)년의 사화(士禍)를 기록하던 사관(史官)은 20년 전에 벌어진 무술년의 옥사를 아쉬워하였다.

 “사리(事理)를 아는 식자들은 한탄하며 말한다. '애석하도다. 군자(君子)는 죄를 다스림에 있어서 항상 관대한 쪽에 기울어 실패를 하고, 소인(小人)은 원수를 갚음에 있어서 반드시 끝장을 보고야 만다. 만약 무술년에 군자들이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소인배들을 처단하였다면 어찌 금일 같은 화(禍)를 입었겠는가?

 사관들은 무술옥사 때 간신인 유자광과 임사홍을 법대로 참형으로 처단하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 유자광과 임사홍은 훗날 복권되어, 그들의 반격으로 20년 후 무오사화(戊午士禍), 그리고 26년 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수많은 선비들이 피를 흘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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