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를 가다 (9)
유자광은 공신 칭호를 빼앗기고 천리 밖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9장
임사홍은 옥중에서 자신을 이 지경까지 이르게 만든 자들을 떠올리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심원, 채수, 이창신......”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잘 알고 지내던 종 4품 의금부 경력이 임사홍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도승지 영감,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갑니다. 주상께서 사형을 감형하라고 명했습니다만, 사헌부와 사간원은 물론 대신들마저 법대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니......”
임사홍은 평소에 자신에게 쓸개라도 내줄 듯이 하던 자들이 등을 돌린 것에 대해 노여움이 불끈 치솟았다.
“이런 자들이 있나! 그들은 나에게 붕당 죄를 덮어씌워, 기어이 내 목숨을 끊고야 말겠다는 것인가?”
의금부 경력은 민망해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서둘러 뭔가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임사홍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들 광재에게 속히 옥에 들리라 기별해주시오.”
임광재가 옥에 당도하자, 임사홍은 거칠게 말했다.
“어떻게든 유배형으로 감형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장(杖)을 맞는 것도 면해야 한다. 장(杖) 1백 대를 맞으면, 유배 길에 죽고 말 것이다.”
임광재가 아버지의 말에 불안한 표정을 짓자 임사홍은 꾸짖듯이 말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공주로 하여금 급히 세 명의 대비들을 찾아가 읍소하고, 종친의 최고 어른들을 통하여 주상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라고 해라.”
현숙 공주는 임사홍의 형장(刑杖)을 면제해 주기를 청하는 글을 임금에게 직접 올리고, 궁궐에 들어가 삼전(三殿)을 뵙고 울면서 시아버지인 임사홍을 구제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삼전(三殿)은 세조의 비인 정희대비 윤씨, 성종의 모친이며 덕종의 비인 인수대비 한씨, 예종의 비인 인혜대비 한씨를 일컬었다.
성종이 대비전에 문안을 올리니, 세 명의 대비들이 이구동성으로 임사홍 구원을 청했다.
“현숙 공주가 임사홍의 일을 듣고 슬피 울며 먹지 아니하니, 본래 지병이 있는데 점점 더해질까 두렵습니다.”
성종은 인혜대비의 수척한 얼굴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현숙 공주는 예종이 일찍 승하하여 젊은 나이로 대비가 된 인혜대비의 유일한 딸이었다.
밀성군(密城君)은 현숙 공주의 청을 듣고, 형님인 효령대군을 모시고 성종을 알현했다. 밀성군은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가 낳은 왕자로 종실의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된 관서인 종부시(宗簿寺) 제조를 맡고 있었다.
성종은 종친의 최고 어른이자, 세종대왕의 아드님 두 분을 예로서 정중히 맞았다. 밀성군이 조목조목 이심원의 잘못된 점을 아뢰었다.
“심원은 망령된 자입니다. 축수재는 주상의 수명과 복을 위한 일인데 폐지하기를 청하였고, 조정에서 크게 쓰는 자는 모두 세조 때의 신하인데 심원이 쓰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신하 된 자의 말이 아닙니다. 조카가 되어 고모부인 임사홍을 죄인이라고 탄핵하였으니, 이는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또한 병든 아비가 있는데 곁에서 약탕을 끓여서 올리지 아니하니, 이는 아들의 도리가 아닙니다.”
성종은 왕실의 어른들에게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구언을 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어찌 이를 가지고 견책하겠습니까? 아비의 병이 있는데 곁에서 병구완을 안 한 것은 종부시에 명하여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효령대군도 손녀사위인 임사홍의 용서를 청했다.
“현숙 공주가 임사홍의 일로 병이 깊어가니 가련합니다. 이 모든 일은 심원이 무뢰(無賴)한 유생과 친분을 맺고 고모부인 임사홍을 탄핵하여 생긴 일이니, 부디 심원을 벌하시고 임사홍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종은 종친의 큰 어른 두 분이 편전에서 안 보일 때까지 일어서서 배웅했다.
무뢰(無賴)는 무례보다 강한 표현이다. 무뢰한 유생이란 예의와 염치가 없는 것에 더하여 불량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선비를 뜻했다. 실록에 기록된 '무뢰'라는 단어는 당시 조정의 훈구대신이나 종친들이 신진 선비들을 보는 시각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성종은 경연에 나아가, 신하들에게 말했다.
"현숙 공주는 일찍이 예종을 여의고 임사홍의 집에 있으면서 의지하여 아버지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 현숙 공주가 병이 들어 밀성군의 집에서 요양하면서 임사홍의 일을 듣고 계속 슬피 울며 먹지 아니하니, 병이 더 깊어지게 생겼다. 내가 환관을 공주에게 보내어, 임사홍이 죄를 범한 것이 깊고 중하여 용서될 리가 만무하니,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였으나, 오히려 먹지 아니하니 심히 슬프고 가엽다.”
성종은 말을 멈추고 잠시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 제영(緹縈)이 글을 올리니, 한나라 문제가 명을 내려 육형(肉刑, 신체를 손상시키는 형벌)을 없앴다. 이태백이 시를 짓기를, 순우의가 엄한 형벌에서 벗어난 것은 임금이 제영을 위한 것이고, 열 명의 아들이 있어도 착하지 못하면 한 어진 딸만 못하다고 하였다. 지금 공주가 비록 미약하나 어찌 제영만 못하겠는가? 내가 임사홍에게 장을 때리는 벌을 면제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제영은 한(漢) 나라 문제(文帝) 때의 효녀로 아비인 순우의가 죄로 인하여 신체를 손상시키는 형벌인 육형(肉刑)을 당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 관비가 됨으로써 아버지의 형벌을 대신하고자 하였다. 이에 감동한 문제는 육형을 폐지하였다고 전해진다.
경연 지사 홍응이 나서서 아뢰었다.
"공주께서 슬퍼함은 진실로 가엾고 민망스러우나, 이미 사형을 감한 것도 성상의 은혜가 지나치게 중하니, 장(杖)을 가볍게 면제할 수는 없습니다.”
대사헌 유지도 거들었다.
"임사홍이 행한 일은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죄는 결코 가볍게 논할 수 없습니다.”
“경들이 법을 고집하고 흔들리지 아니함은 진실로 아는 바이오. 다만 공주가 본래 병이 있어서 이로 인하여 점점 더해질까 두렵소. 또 공주의 일로 인해 삼전(三殿)께서 애처로워하시니, 과인 또한 마음을 잡을 수가 없소.”
홍응이 다시 나서서 아뢰었다.
"일시의 은혜와 인정은 이와 같을지라도, 인정으로 인해 법을 굽힐 수는 없습니다.”
"대신과 대간의 말이 진실로 옳소. 다만 오늘 삼전(三殿)에 문안을 하였더니, 현숙 공주가 병든 몸으로 와서 통곡하고 삼전께서도 슬프게 눈물을 흘리셨소. 대저 아들의 마음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효도로 삼는 것이오. 지금 대비들께서 편치 못하신대, 아들의 마음이 어떻겠소?”
좌우의 신하들이 임금의 탄식에 머리만 조아리고 있자, 성종은 말을 이었다.
“경들은 말하기를, 징계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를 그르치는 데 이를 것이라고 하나, 과인이 비록 밝은 임금은 아닐지라도 어찌 노기와 왕안석과 같은 자가 나와서 정사를 어지럽도록 하겠는가? 사관이 나를 가리켜, 소인을 알면서도 엄하게 처벌하지 못했다고 기록할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과인이 법을 굽히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오. 또 유자광은 선왕조 때의 공신으로 일찍이 함께 삽혈동맹을 하였는데, 사직에 관계되지도 않는 일로써 하루아침에 형장(刑杖)을 가하는 것은 의리에 옳지 못한 것이오. 가령 정승들이 죄가 있다면 일일이 매질하는 것이 옳겠는가?”
한명회는 유자광의 이름이 들먹여지자, 급히 나서서 아뢰었다.
"청컨대 유자광을 공신록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가산을 몰수하소서. 예로부터 공신록에 이름을 올린 자로서 귀양을 간 자는 없습니다.”
대사헌 유지도 한명회를 거들었다.
"법에 의하면, 공신록에서 지우고 가산을 몰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사형을 감하시고 또 형장을 면제하시고 처자를 종으로 삼는 것도 면제하셨으니, 그 나머지는 법대로 공신록에서 유자광의 이름을 지우고 가산을 몰수하소서.”
"반역을 한 것도 아닌데, 어찌 가산을 몰수까지 하겠는가? 그러나 정승들이 어찌 감히 옳지 못한 일을 아뢰겠는가? 유자광을 공신록에서 삭제하라.”
조정에서 대간들은 물론 대신들도 유자광을 편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훈구대신들은 유자광이 한명회와 자신들을 탄핵한 원한이 남아있었고, 젊은 관료들로 구성된 대간들은 태생적으로 천출인 유자광이 나쁜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고 죄를 가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성종은 대신들과 대간들의 주장인 공론(公論)을 존중하여 유자광을 공신록에서 삭제를 하고, 대신 장을 때리는 것과 처자를 종으로 삼는 것, 가산을 몰수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유자광은 임사홍이 자신의 급하고 강직한 성정을 이용하여 충동질을 한 것에 넘어갔다고 생각했으나, 붕당 죄로 몰려 죄를 받는 것은 억울하였다. 대간도 아니면서 현석규 일을 상소한다는 것은 그의 어머니의 교훈대로 주제넘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오로지 임금을 위해 상소를 한 것뿐이었는데 결과는 공신 칭호를 빼앗기고 천리 밖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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