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 작가의 야설 천하<제2화> 명필 이삼만 (1)이야기꾼들
<제2화> 명필 이삼만 (1)이야기꾼들
입력 2020. 09. 06. 17: 39
■강형구 작가의 전설따라 남도삼백리
<제2화> 명필 이삼만 (1)이야기꾼들
그림/정경도(한국화가)
그림/정경도(한국화가)
눈 내리고 북풍 몰아치는 한겨울 허물어진 흙담에 초개이엉 두른 뉘 사랑채 아랫목에 가면 으레 거기 한 마을을 아우르는 이야기꾼이 있게 마련이고, 또 한 여름 옛 마을 초입 수백 년을 자라온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 짙게 드리워진 기왓장에 푸른 이끼 돋아난 유선각(遊仙閣)에 가면 거기 구수한 입담을 풀어내는 초로의 이야기꾼들이 있게 마련이니 이 더위 뜨거운 한여름에도 이야기꾼의 소리는 활활 타는 대지의 열기를 식히고 또 거기 우스갯소리에 진한 농까지 더하여 때론 세상을 살아가는 누더기 쓴 인생의 오밀조밀한 저 깊은 내력까지 얼핏 들춰내 더듬기도 하는 것이었으니 지금은 그 자리를 텔레비전이다 컴퓨터다 휴대폰이다 하는 것들이 다 차지해 들어앉아 버려서 죄다 오래 전에 잊어져 버린 것들이겠으나 그 옛날 풍경은 그래도 시장 할 때 된장버무린 소담한 한 바구니 싱싱하고 단아한 맛깔 나는 나무새 반찬이었으리라.
주름투성이 얼굴에 하얀 수염 흩날리는 가난한 농투성이의 비루한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피어나는 구수한 입담이 마치 열반한 노승의 불 달은 뼈마디에서 쏟아지는 빛나는 사리처럼 진기한 것이기도 하였으니 또 한 겨울 혹한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매화꽃망울처럼 코끝 시리게 톡 쏘고 들어와 가슴을 시큼하게 적시는 싱싱한 향기이기도 하였거니 세상의 요긴한 잔꾀란 것들이 모두 고단하고 서러운 인생살이에서 오는 사고(思考)의 틈바구니에 낀 반짝이는 보석이고 보면 그 어찌 나무랄 데가 있겠는가!
이 삼복더위 염천 하늘아래서도 오늘 시름 다 던져두고 이마에 땀 씻어내며 저 오래 된 느티나무 아래로 가서 벌렁 드러누워 건너 먼 산을 질러오는 바람 한 조각에 더운 숨결 던져보자. 이렇게 별 볼일 없이 도연명처럼 피비린내 나는 악다구니 아귀다툼 세상 속 돈 보따리 부귀영화에 저 흔하디흔한 온갖 지위와 복락에 공명 따위 단박에 초개처럼 시궁창에 콱! 내팽개쳐 버리고 한달음에 도망해 달아나와 밤마다 귀신 나온다는 세상 끝 바깥 산모롱이 연못가 밭 자락 귀퉁이 초막 한 칸에 자신을 내던져 비루하게 숨어 살아오면서 사라져 가는 인생이 주는 마지막 객담(客談)과 그 두엄 속 같은 객담 속을 헤집으며 오늘의 쓸쓸한 객담을 쌓아가는 것이 이놈 세월이거늘, 그놈의 모진 세월 죽기 전엔 누구에게는 참 서럽고 고약한 것이렷다.
그렇다면 또 이 끝없는 길가는 떠돌이 나그네 같은 누더기 덕지덕지 기워 쓴 이놈 인생도 그 옛날 어느 그늘 짙은 유선각가에 불청객하나 떡하니 걸터앉아 천근같은 발길 산더미 같은 지친 사연 거기 쉬어두고 잠시 귀동냥이나 하렷다. 왕후장상에 권문세가, 청렴결백한 박사학자에 도둑놈 강도에 귀부인에 기생, 곰보째보에 절름발이, 무당에 중, 기생에 갈보창녀이야기 그 무엇인들 누구 눈치 살핀다고 가릴 것 있으랴! 다 똑같이 한번 왔다 가는 인생아! 째진 입 있으면 다 토해 내 보거라! 어디 이 동네 저 늙수그레한 저 양반의 입담이 그래도 오늘 이 쓸쓸하고 고단한 객의 고독한 마음을 휘어잡아 주려나? 아따! 마침 시원한 바람 불어온다.
“에 어흠! 에헤헤헤헤! 드디어 저 곰방대 핀 할아버지 허연 수염 오물오물 구수한 입담이 나온다. 에헤! 좋다! 거! 옛날 간 날에 백여시에 호랭이 담배 즐겨 퍼 묵던 시절에 말이여.......”
어느 고을에 도둑질을 아주 잘하는 적동이라는 사내가 살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 등에 작은 새알 크기의 붉은 점이 있어 제 할아버지가 붉을 적(赤)자에 아이 동(童)이라 짓고 적동이라 불렀는데, 나이 서른에 마을에서는 도둑 적(賊)자에 적동으로 멀리까지 이르게 되었고 집안에서는 도둑질로 돈을 모아 부자가 되었으니 쌓을 적(積)자에 적동으로 통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 적동의 아버지는 그 적동이라는 이름이 싫어 글 잘하는 아이가 되라고 글 서(書)자를 써서 서동(書童)이라 부르자고 했다는데 그랬다가는 영락없이 쥐서(鼠)자 서동이가 되어 정말로 ‘쥐새끼’로 온 고을에 그 이름을 떨쳤지 않았을까 싶다.
고을에 진기한 무엇을 도둑맞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으레 그 적동을 의심했는데 그 재주가 어떻게나 신출귀몰했던지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그 옛 속담이 무색하게도 흔적과 물증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긴 그 생김새도 마치 생쥐를 닮아 타고난 쥐 얼굴이었는데 쥐란 동물이 평생 동안 밤에 은밀히 어두운 곳으로 다니며 남의 먹을 것을 몰래 훔쳐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쥐도 새도 모르게 도둑질을 잘한다는 그 적동의 행태를 미리부터 들어 알고 있었던 그 고을의 권력을 틀어쥐고 사는 수염이 허연 이진사는 오래전부터 그 적동을 붙잡아 크게 혼을 내주려고 마음을 먹고 여러 계책을 궁리하고 있었다. <계속>
■강형구 작가의 野說天下
<제2화> 명필 이삼만 (2)목숨을 건 도둑질내기
그림/이지선(홍익대 미술학과 졸업)
그림/이지선(홍익대 미술대학 졸업)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그 적동을 붙잡을 묘안을 이진사는 찾지 못했다. 수많은 서책을 탐독하고 숱한 이야기며 역사를 공부하면서 고을의 고명한 선비로 살아가는 이진사는 도둑질을 잘한다는 저 적동을 붙잡아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고 싶은 그 선비의 의기라는 것을 갖게 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 적동이의 재주가 얼마나 신통한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아마도 저 적동이 전쟁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적진에 들어가 중요한 정보를 훔쳐오는 자가 되었거나 적국에 들어가서 중요한 기밀을 몰래 가져오는 일에 종사했더라면 적격이었으리라는 생각을 나름 해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이진사는 그 적동을 자신의 집에서 우연히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적동이 이진사 댁에 전할 물건을 지게에 짊어지고 와서 창고에 부렸던 것이다. 적동을 보아하니 영락없는 쥐 얼굴이었다. 반짝이는 눈망울에 날카로운 턱, 가늘게 뻗어 내린 수염, 비록 쥐가 남의 것을 훔쳐 먹고 살아간다고는 하나 새끼를 많이 낳고, 쥐 굴을 파보기라도 할라치면 굴마다 벼이삭이며 곡식들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으니 그 또한 만물에게 하늘이 공평하게 내려준 저만의 생존의 복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진사는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허 허흠! 적동이 자네, 이리 좀 와보게,”
말없이 적동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사가 마당가에 서있는 적동을 대뜸 불러 세웠다.
“아이구! 나리! 무슨 일이십니까?”
한달음에 달려온 적동이 이진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어 어흠! 사실은 자네가 남이 갖지 못한 신기한 기술을 가졌다고 내 일찍이 들었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 우리 집 하인들이 일 잘하는 저 황소를 대문 앞에 매어 놓았네.”
이진사가 대문 앞에 매어놓은 커다란 황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적동은 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이진사가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 마루에 앉아서 지키고 있을 것인즉 내일 동이 터 오르는 아침 안으로 저 황소를 나 모르게 훔쳐 간다면 저 황소를 자네에게 주겠네. 그러나 만약 훔쳐가지 못한다면 자네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약조를 걸고 내기를 한번 해보고 싶다네. 과연 자네 나하고 그 내기를 할 수 있겠는가?”
이진사는 머릿속을 찰나에 스쳐가는 생각을 주저 없이 말하며 적동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저 적동이 과연 큰 도적의 당찬 기백이 있을 것인가?’ 큰 도적이라면, 정말로 간 큰 대도(大盜)라면 자신이 불리한 어느 상황에서라도 자신만의 특별한 대책이 있을 것이기에 목숨을 아깝지 않게 내놓고 덤빌 것이고, 만약 작은 도적이라면 슬슬 눈치를 살피고는 꼬리를 사릴 것이 빤했다.
“예! 나리,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분명 저 소를 하룻밤 안에 진사나리 모르게 훔쳐만 가면 저에게 주신다는 말씀이지요?”
잠시 동안의 긴장을 깨고 적동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 이진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가 보던 너무도 빤한 내기였기에 적동이 꼬리를 사리고 대번 작은 강아지처럼 땅에 배를 납작하게 깔고 낑낑대며 움츠러지려니 했는데 의외의 당찬 대답에 이진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적동을 바라보았다. <계속>
남도일보(http://www.namdonews.com)
'이러 저런 아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필 이삼만 (5)제 5회 만천과해(瞞天過海) (0) | 2023.03.30 |
---|---|
강형구 작가의 野說天下<제2화> 명필 이삼만 (3)어리석은 바보 (0) | 2023.03.27 |
두 여인을 동시에 (0) | 2023.03.21 |
유쾌한 꼰대씨 송복이 말하는 나, 10/3 (0) | 2023.03.20 |
자작나무에 새긴 '♡'... 영원한 상처로 남았습니다 (0) | 2023.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