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강형구 작가의 野說天下 <제2화>
명필 이삼만 (5)제 5회 만천과해(瞞天過海)
입력 2020. 09. 10 18: 43
![](https://blog.kakaocdn.net/dn/bs8MrT/btr6TmXMXNW/TJDKOcFj3FzfT8gUXeADEK/img.jpg)
그림/이미애(단국대 예술대학 졸업)
한달음에 대문 앞에 당도한 이진사는 기가 콱! 막혔다. 거기 묶여 있어야할 황소는 없고 막 싸놓은 소똥 내음에 생풀들만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잠시 넋을 잃고 서있던 이진사는 적동이 흰옷을 입고 걸터앉아 있는 감나무를 바라보았다. 거기 아직 흰옷은 그대로였다.
‘그 그렇다면!.......’
이진사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을 스쳐가는 것이 있어 감나무 아래로 미친 듯이 뛰어가면서 집안을 바라보고 소리쳤다.
“이놈들아! 어서 횃불을 들고 나오너라!”
이진사가 감나무 아래에 당도하고 뒤이어 턱수염이 새까맣게 자란 젊은 하인이 횃불을 들고 두서너 명 늙은 하인이 줄줄이 뒤따라 왔다. 횃불을 비춰 감나무의 흰옷을 확인해 보니 역시 생각했던 대로 빈 옷가지만 거기 덜렁 걸려 있던 것이다.
“졌도다! 내가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고도 몰라보았구나! 으으하하하하하하!”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적동의 계략에 말려든 이진사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친놈처럼 크게 고함을 지르면서 사위가 무너져 내리도록 호방하게 너털웃음을 쏟아냈다.
적동은 밤에 흰옷을 부러 입고 나와 지식인 이진사의 오만하고도 치밀하고도 예리한 예봉을 제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온통 무디게 흩어버렸던 것이다. ‘무식한 도둑놈에 불과한 적동!’이라는 섣부른 판단 바로 그것을 노렸던 것이고, 적동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공략의 틈이 있다는 것을 문자속량의 빛나는 허울을 쓰고 거창한 공명의식과 정의감에만 충만해 있던 요샛말로 하면 부유한 집안의 잘생기고 총명한 저 먹물 지식인 이진사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것은 상대의 치열한 경계를 풀어 놓게 하는 최고의 효과로 작용했다. 이른바 적동의 명약처방이었다. 만약 적동이 밤에 검은 옷을 입고 감나무 가지 위에 올라가 있었다면 그 감잎에 가려 살피기가 곤란하였던 이진사는 목표물인 황소를 더욱 철저히 감시하는 역효과를 낳았겠으나, 하필 삼척동자도 비웃을 밤에 흰옷을 입고 올라가 있었으니 얼마나 감시가 수월한가! 그 수월함이 느슨함을 낳았고,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도 연약한 사슴을 사냥할 때 사력을 다하는 법인데 이진사는 상대를 한껏 얕잡아보고 비웃으며 ‘귀중한 누구 목숨이 달린 엄정한 내기’에 술까지 마시는 거드름을 피웠고, 그 느슨함이 방심이 되었고, 그 방심이 결국 자업자득 목표물을 감쪽같이 공략 당하는 천금 같은 여유를 주고만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적동은 어둠을 틈타 훌렁 옷을 벗어 감나무 가지에 그대로 걸어놓고 발가벗은 몸으로 감나무를 조심스럽게 기어 내려와 담장 밖으로 나가 풍경이 울리지 않게 풍경 안에 풀을 잔뜩 집어넣고는 소고삐를 풀어 쥐고 삽시간에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허허! 설인귀가 황제 이세민을 속이고 몰래 배에 태워 바다를 건넜다더니 참으로 만천과해(瞞天過海)로다! 저 적동의 백의기망혼돈계(白衣欺妄混沌計)에 내가 그만 말려들어 당했구나! 그래! 그래! 저 삼국지 조조의 공성계(空城計)에 못지않구나! 이리하여 옛 말씀에 큰 인물은 하늘이 내고, 큰 도적도 하늘이 낸다고 했단 말인가! 내 수양이 참으로 얕고도 얕도다!...... 으음! 그렇다! 저 도둑질도 하늘이 준 재주라고 한다면, 길가의 개똥이나 잡초가 약이 되듯 저 재주를 시절을 잘 만나 좋은 곳에만 쓴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을 으으음!.........’
이진사는 길게 탄식을 하며 자신의 치밀하지 못함을 스스로 원망했다.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계속>
강형구 작가의 野說天下
<제2화> 명필 이삼만 (6회) 소경 점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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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미애(단국대 예술대학 졸업)
이진사는 헛웃음을 삼켜 물며 스스로의 잘못을 뒤돌아 반성해 보면서 내기에서 패배한 것을 깨끗이 승복하고는 약속대로 황소를 적동에게 주고 비록 도둑질 재주지만 적동의 비상함에 감탄해하며 말했다.
“자네의 그 재주는 참으로 신통함에 이르렀네. 내 비록 내기에는 졌지만 한마디 이르겠네. 자네가 가진 재주는 남에게 내세울 좋은 재주가 절대로 아니네. 가족들이 배를 곯지만 않는다면 탐욕을 절제하고 그 재주를 깊숙이 숨기고 살기 바라네. 자칫 잘못하면 정말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일세. 하늘이 준 재주는 자신의 사익(私益)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위해 써야하기 때문이라네. 그리고 가난한 백성의 것은 절대로 탐내서는 아니 될 것이야! 내 말 깊이 명심하게!”
“예 나리, 잘 알겠습니다.”
적동은 이진사의 말에 깊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그 자리를 물러났다. 이진사를 도둑질 내기에서 이긴 적동의 이야기가 일대에 파다하게 퍼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던 것이다.
“아따! 재밌네! 그놈 적동이 정말 기가 막힌 도둑놈이구만!”
“어허! 그러네. 밤에 흰옷을 입고 감나무에 올라가 그리 관심을 쏠려놓고는 저는 깨댕이 홀랑 벗고 내려가서 눈 번하게 뜬 그 앞에서 소를 귀신같이 도둑질해가다니 참말로 산 눈깔 빼먹을 비상한 놈이네 그려! 그런데 말이여! 인자 봉깨로 참으로 저 양반 이야기 구성지게 참 잘허네!”
이렇게 한 소절 도둑놈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또 누가 바람 따라 꼬리이어 불어오는 바람처럼 이야기를 해대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말이여? 누가 또 진기한 이야기 한 소절 보태볼 것이냐?’ 때마침 유선각 마루 뒤쪽에 걸터앉은 검은 수염 덥수룩한 중년의 사내가 불쑥 나선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말이여! 고려 개경에 살 땐디 말이여!”
참! 그 목소리 걸걸하니 좋다. 도둑놈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왕 이야기가 나온단다. 그것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말이다.
이성계가 고려 장군으로 승승장구 명성을 날릴 때 하루는 개경 남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남문 앞 구석에 남루한 소경 점쟁이가 하나 앉아 지나가는 사람의 점을 치고 있었다. 이성계는 그 점쟁이가 궁금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옆에 비켜서서 그 점쟁이가 어떻게 점을 치는가하고 가만히 눈여겨보는 것이었다. 이순이 넘은 듯 백발에 하얀 수염을 주름 가득한 얼굴 에 늘어뜨리고 눈알에 하얀 창이 들여다보였는데 초점 잃은 눈동자는 온통 검은색이라서 한눈에도 그가 소경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손때 묻은 낡은 지팡이에 의지해 앞을 분간해가는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 어떻게 남의 운명을 알아보는 점을 칠 수 있단 말인가? 마른 명태처럼 핏기 없는 깡마른 몸매에 볼 품 없는 저 눈먼 소경에게 ‘하늘은 만인에게 고루 공평하다’더니 앞을 보지 못하는 대신 남의 앞일은 귀신처럼 알아보는 신기한 재주를 주어 밥을 벌어먹고 생명을 연장하며 살 기회를 주었단 말인가?
이성계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소경점쟁이 하는 꼴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길을 가던 누더기차림의 비렁뱅이 거지하나가 그 앞에 풀썩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었다. <계속>
남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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