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첩이 아니라 제 첩이었소
옛날, 옛날, 조선 초 태종시대에 박저생(朴抵生)이라는 양반(?)이 살았습니다. 아 그런데 태종 12년 계모 곽씨(郭氏)가“박저생은 전에 아비의 비첩(婢妾) 파독(波獨)을 간음했습니다.”라고 고발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헌부에서 조사를 해보니 “파독(波獨)을 박저생이 처음에 첩으로 삼았으나, 그 아비 박침(朴?)이 중간에 범간(犯奸)하였고, 박침이 죽자 박저생이 다시 아비의 첩(?)을 되찾아 첩으로 데불고 살았다”고 밝혔으니 이 무슨 놈의 경우인줄 알 수가 없습니다요. 세상에 이런 일도 있나요.
이 기가 막힌 사나이 박저생(朴抵生)의 일생을 왕조실록으로 재생해 보겠습니다.
☞태종 3권, 2년(1402) 6월 11일(계해) 7번째기사
계집종을 가까이 한다고 질투한 아내를 구타한 박저생을 귀양보내다
박저생(朴抵生)을 사주(泗州)로 귀양보내었다. 박저생은 부상(父喪)을 당했을 때 호군(護軍)에 임명되어 기복(起復= 상중에 있는 관리를 탈상 전에 관직에 복용하는 것) 되었고, 지삼척군사(知三陟郡事)로 임명을 받았는데, 관(官)에 있으면서 기생에게 빠지매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그를 파면하였다. 서울에 당도하자, 또 그 계집종[婢]을 가까이하여 그 아내가 질투하므로 박저생이 적쇠[炙鐵]로 아내를 때렸다. 그 아내는 재신(宰臣) 이서원(李舒原)의 딸이었다. 이서원이 사헌부에 고발하니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아뢰어서 저생은 사주(泗州)로, 그 아내는 김제(金堤)로 귀양보내었다.
☞태종 24권, 12년(1412 임진) 12월 11일(임술) 3번째기사
박저생의 부자의 간음 사건에 대한 판결 문제를 의논하다
정해년(태종 7년) 2월에 이르러 사헌부(司憲府)·사간원·형조에서 아뢰었다.
“신 등이 박저생(朴抵生)의 옥사를 상국(詳鞫)하오니, 박저생이 처음에 파독(波獨)을 첩으로 삼았으나, 그 아비 박침(朴?)이 중간에 범간(犯奸)하였고, 박침이 죽자 박저생이 다시 첩으로 삼았으니, 부자가 공간(共奸)한 정상이 명백합니다. 곽씨로 말하면 규문(閨門)의 추한 것을 양설(揚說= 공공연하게 말함) 함으로써 그 남편의 죄악을 드러내게 하였고, 파독으로 말하면 아비와 아들의 첩이 되기를 달게 여겨 거부하지 않았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일일이 율(律)에 의하여 논죄(論罪)하소서.”
명하여 각각 한 등을 감하여, 박저생은 장(杖) 1백 대에 유(流) 3천 리를, 곽씨는 장 90대에 도(徒) 2년 반(半)을, 파독은 장 1백 대에 여죄(餘罪)는 수속(收贖)하게 하였다. 이에 박저생의 아들이 격고(擊鼓= 북을 호소함)하여 아뢰기를,
“신의 아비가 비록 스스로 밝힐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러나 여러 번 대유(大宥=대사면)를 거쳤으니 죄를 면할 만합니다.”
하므로,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었다. 의정부·육조(六曹)에서 아뢰었다.
“안율(按律)하건대, ‘조(祖)·부(父)의 첩(妾)을 간음하면 참(斬)한다.’하였으니, 박저생의 죄는 마땅히 이 형벌을 받아야 하며, 인륜(人倫)의 대변(大變)을 용서함은 옳지 못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 계집 종[婢]은 본시 박저생의 첩인데 그 아비가 간음을 행했으나, 이 계집 종이 실지로 고하지 아니하였다. 그 아비가 죽은 뒤에 박저생이 재간(再奸)하였어도 아비의 연고 때문에 그 아들을 고하지 아니하였다. 이제 직접 아비의 첩을 간음한 것으로 여겨 참(斬)함은 그것이 ‘죄가 의심나거던 오직 가볍게 벌을 주라’는 뜻에 있어 어떻겠는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또 삼성(三省 =대간(臺諫)과 형조) 의 장관을 불러 말하였다.
“박저생의 죄는 진실로 죽여야 마땅하나, 자복(自服)한 공초를 받지 않고 법에 처치함은 혐의됨이 없겠는가?”
형조 판서 김희선(金希善)이 아뢰었다.
“사증(辭證)이 명백하여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박저생으로 말하면, 이미 율(律)이 사형(死刑)에 해당함을 알고 있으니, 어찌 기꺼이 스스로 결초(決招)를 바치겠습니까? 원컨대, 율에 의하여 논죄하소서.”
박저생의 아우 박강생·박신생이 의정부에 투첩(投牒)하여 삼성(三省)에서 형의 죄를 오결(誤決)했다고 호소하니, 삼성에서는 박강생 등이 말을 꾸며 망령되게 고하여 해당 관서를 능욕하였다 하여 아전을 보내어 두 사람과 곽씨의 집을 수직(守直)하게 하였다. 임금이 3성 장무(三省掌務)를 불러 묻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 곽씨가 지아비의 죄악을 들어냈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의자(義子)를 해하고자 하다가 결국은 남편의 죄악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곽씨는 본시 의자를 죄주고자 하였을 뿐이요, 처음부터 남편의 죄악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하고, 또
“박강생과 박신생의 죄는 어떤가?”
하니, 대답하였다.
“박저생의 죄를 국문(鞫問)한 지 수년이 되었는데, 박강생 등은 그간 한마디 말도 없다가 이제 결단을 내리자 오결이라 칭하니, 어찌 그것이 사실이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이 앞서는 형(兄)의 죄가 미결 중이라 느즈러뜨려도 좋았지만, 지금은 사죄(死罪)에 처했으니, 형제의 정으로써 어찌 일의 시비를 헤아린 뒤에 변명(辯明)하겠는가? 이제 모두 석방하게 하라.”
이윽고 박저생이 옥중으로부터 도피하여, 이름을 바꾸어 생원 박의(朴義)라 하고, 밀양군(密陽郡)에 이르러 또다시 전 언양 감무(彦陽監務) 장효례(張孝禮)와 재산을 다투었다. 지군사(知郡事) 우균(禹均)이 발각하고 힐문하니, 박저생이 스스로 말하였다.
“거년(去年) 가을에 도피하였을 때, 형조에서 포(布) 2백 40필을 징수하였으니, 내 사죄(死罪)는 이미 속(贖)되었다.”
관찰사가 체포하여 아뢰니, 사헌부에서 상언하였다.
“박저생은 그저 마음을 고치지 아니하고, 이름을 바꾸어서 이익을 다투었으니, 율(律)에 의하여 시행(施行)하되, 무부(無父)·내란(內亂)의 죄로 바루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윽고 박저생이 또 다시 옥중에서 도피하였는데, 유지(宥旨)를 거쳐서 나왔다. 유사(攸司)에서 또 치죄(治罪)하고자 하였으나, 유지를 거쳤으므로 대벽(大?= 사형)을 면하고 울주(蔚州)에 부처(付處)되었다. 또 김화현(金化縣)에 도망하여 숨었다가 그 현(縣) 사람과 밭을 다투어 불의(不義)를 자행(恣行)하였다. 그 현(縣) 사람의 아내가 달려가 헌사(憲司)에 고하매, 이문(移文)하여 구집(拘執) 하니, 박저생이 자살하였다.
'옛(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삼대의 애기 (0) | 2008.04.30 |
---|---|
그 사람과는 원수지간 아니오 ? (0) | 2008.04.22 |
성냥 의 얽힌 이야기 (0) | 2008.04.21 |
마음이 너그러워야 (0) | 2008.04.19 |
기미년 3월1일의 秘話 (0) | 2008.04.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