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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기미년 3월1일의 秘話

by 까망잉크 2008. 4. 16.
 

기미년 3월 1일의 秘話


때는 1919년(기미년) 2월 하순 어느 날, 어스름이 깔리는 안국동 사거리 근처에 한 사내가 땅 밑을 바라보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申哲: 일명 申勝熙)이었다. 그는 발밑으로 들려오는 어떤 기계 소리를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옆 건물인 보성사(普成社)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소였다. 불빛은 없었다. 그가 닫힌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니 안에는 불빛이 환했고 윤전기에서는 무엇인가 인쇄 중이었다. 빼내어 보니 ‘독립선언서’였다. 인쇄소를 급습 당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 33인의 1인)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신철은 선언서 한 장을 챙겨 들고 말없이 인쇄소를 나갔다.

 

이종일은 즉시 천도교 유력자인 최린(崔麟)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고, 최린은 신철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최린은 신철에게 민족을 위해 며칠 동안만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때 최린은 그에게 5천원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 당시 쌀 한 가마니의 값이 41원이었다. 일본 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 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나갔다고 되어 있다.

 

최린의 집에서 나온 신철이 입을 다물음으로써 3 . 1운동의 모의는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만세 운동 지도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신철은 현장을 피하여 만주로 출장을 떠났다. 만세 운동이 진압 될 무렵인 5월 14일에 서울로 돌아온 신철은 정보를 갖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경성헌병대에 투옥 중에 곧 자살했다. [매일신보. 1919년 5월 22일자]

 

신복룡의 한국사 새로 보기에서

** 역사의 그늘에서 방황하다가 민족앞에 참회한 고인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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