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양군의 무력정변의 배경
인빈 김 씨와 그녀의 소생들을 총애했던 선조였지만 임진왜란과 그밖의 여러가 지 이유로 광해군에게 세자자리에서 밀린 인빈김씨와 그녀의 소생들 은 항상 불만을 갖고있었다. 후에 광해군이 왕권강화 차원에서 그녀 의 소생중에 가장 위험한 존재로 지목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능 창군을 신경희 사건과 연루시켜 사사하고 인목대비마저 유폐시키자 능 창군의 맏형인 능양군은 영창대군을 지지하고 인목대비를 따르고 있 던 서인들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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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 에 관한 합당한 이유 세가지
첫째 선왕을 독살하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어머니인 자신을 유폐시켰다는 것. 둘째 과 도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여 정사를 위태롭게 했 다는 것. 셋째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투항했다는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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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등극후의 수습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복원했으며, 광해군 시절 정권을 독 점했던 정인 홍, 이이첨 등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대북 세력 200여 명 을 모두 숙청하였다. 그리고 인목대비 유폐를 반대하다 여주 에 유배 중이던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앉히고 반정에 가담했던 서인의 김 류, 이귀 등 33명을 세 등급으로 분리해 정사공신의 훈호를 내렸다. 그는 또한 광해군에 의해 희생된 영창대군,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 지 김제남 등을 신원하고, 나머지 희생자들도 대부분 관작을 복구시켰 다. 이렇게 하여 조정은 서인이 제1당, 남인이 제2당이 되었다. 한 편 대외적으로는 친명배 금 정책을 실시하여 그동안 광해군이 유지해 오던 중립 외교의 틀을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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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대 강
호시탐 탐 내침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이 3년 뒤인 1627년, 3만의 군사를 이끌 고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을 일으키 자 후금군의 기세에 위험을 느 낀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 때 후금은 조선측 에 서신을 보내 어 자신들의 침략 이유 일곱가지를 밝히며 조선의 만 주 영토를 후금에 내 놓을 것,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보낼 것, 명 나라 토벌에 3만 군사를 지원할 것 등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내걸었 다. 이에 최명길 등이 강화 회담에 나서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으면 후 금과 형제 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을 앞세워 약조를 성 립시키자 후금은 철군하였다. 이 후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 꾼 다음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 관계를 폐지하고 새로 군신 관계 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하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하자 그들은 다시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 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 조는 삼전 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 편, 소현세 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이 때 척화론 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함께 청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으로 조선 은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되었던 국가 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 어 민생은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이모든 일 련의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이괄의 난때 이괄이 북방 주력부대 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기에 변방의 수비에 많은 허점이 생겼던 까닭 일 것이다. |
인조의 업적
1624년에 는 총융청, 수어청 등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여 북방과 해안 방어를 보 강 했고, 이후 군역의 세납화와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사목을 발표했 다. 이로써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1628 년에는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표류하여 왔는데, 그의 이름을 박연으 로 고치고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 넣어 대포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 치게 해 조선군의 화력을 증강시키기도 했다. 한편 민생 안정책으로 광해군 당시 경기도에 한정해서 실시하던 대동법을 1623년 강원도까 지 확대 실시해 징세의 일원화를 꾀하고 민간의 부담을 줄였으며, 1634년에는 삼남 일대에 양전을 실시하여 농경지의 면적을 정확하게 측 정함으로써 세금 수입을 확대시켰다. 또한 농토세 징수 규범인 전 세법을 폐지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다. 그리고 화폐 사용을 위해 1633년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했으며, 청인과의 민간 무 역을 공인하여 북관 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중강에 시장을 열었 다.(경원개시, 중강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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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화형성
1645년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정두원과 소 현세자가 돌아오면서 화포, 천리 경, 과학 서적, 천주교 서적 등을 가져오고, 송인룡 등이 서양의 역법 인 시헌력을 수입하여 새로운 문화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 시 기에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람' 등의 책들이 간행되었 고, 송시열, 송준길, 김육, 김집 등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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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렬왕후 한씨
영돈녕부 사 한준겸의 딸로 원주읍내 우소에서 태어났다. 1610년 능양군과 결혼 하여 청성현부인에 봉해지고 1623 년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슬하에 소현, 봉림, 인평, 용성 등 네 아들을 낳고 1635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은 장릉으로 인조 와 함께 경기 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었으나 영조 때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 로 옮겨졌다.
장렬왕후 조씨
한원부원 군 조창원의 딸로 1635년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뒤인 1638 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44세인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1649년 인조가 죽자 대비가 되고 1659년 효종이 죽자 다시 대왕대비가 되었다. 이 때 그녀가 입어야 할 상복이 정 치 문제화되어 서인이 만 1년만 착복 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주장하여 그 절차대로 복상을 치렀다. 하지만 이듬해 남 인 허목 등이 대왕대비의 복상은 3년을 착용해야 한다는 3 년설을 제기하여 서인을 공격했다. 이에 서인의 거두 송 시열은 효종 이 맏아들이 아니고 둘째 아들이므로 복상은 1년만 착용하면 된다는 기년설을 다시 주장했고, 남인 윤 후 등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 니 맏아들이나 다름없다고 반박하며 3년설을 주장했다. 결국 이 복상 문제는 양당간의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고 송시열 등의 주장에 따라 기 년설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 의 입지가 약해지고 서인의 입김이 강 해졌다. 하지만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다시 이 복상 문 제가 대 두되어 남인은 기년설을, 서인은 대공설(9개월설)을 주장하였 는데, 이 때는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어 서인 정권이 몰락하고 남인 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1688년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능은 휘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소현세자
인조의 맏아들이며 이름은 왕, 어머니는 인렬왕후 한씨이다. 1625년에 세자 에 책봉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는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 을 수습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해에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7 년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 에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이 후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 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기도 했 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그와 해결하려 했고, 이는 결 과적 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이같은 외교 솜씨를 발휘하는 한편으로 소현세자는 서 양 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지냈으며,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 학, 수학 등을 접하였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소현세자의 이같은 활동을 친청 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비 난했다. 당시 조정은 대부분 친명반 청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 기 때문이다. 인조 역시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만큼 소현세자 를 좋아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그가 조선 국왕으로서 부적격하다는 판 단을 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인조가 총애하던 후궁 귀인 조 소용과 세 자빈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 다. 소현세자가 9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1645년 귀국하였을 때 인조는 그를 무척 박대한다. 인조는 소현세자 가 철저한 친청주의 자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청에서 가져온 서 양 문물조차도 수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인다. 입국 후 2달 뒤 인 4월 23일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웠고, 와병한 지 3일 만 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 때 그의 온 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 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일부 학자 들은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 34세의 혈기왕성한 나이로 죽은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가 두 명은 병에 걸려 죽었다. 이 사건 이후 인 조는 손자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 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시켰다. 소현세자는 죽은 후 경기도 고 양시에 묻혔는데, 처음에는 이 무덤을 소현묘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 에 이르러 소경원으로 격상되었다.
인평대군
인조의 셋째 아들로 이름은 요, 자 는 용함, 호는 송계이다. 1630년 인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637년 심양 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 후 1650년부터 네 차례 에 걸쳐 사은사로 심양을 다녀왔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했고 제자백 가의 사상에도 정 통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 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도 친분이 두터 웠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산수도', '노승하관도', '고백도' 등이 있 다. 이러한 미술품 이외에 '송계집', '연행록', '산행록' 등의 저서 가 남아 있다. 사후에는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경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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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inp.netian.com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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