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놀고 사는 데에는 나름대로 양식과 문화가 있게 마련이다. 가난함에 오히려 너그러움과 질박함이 있고 여유로움에 오히려 각박하고 사치가 물을 흐릴 수도 있다. 생활문화는 이처럼 다양한 얼굴을 하고 그 시대를 증언한다. 세월에 따라 진화한다고 하지만 반드시 순기능 쪽으로만 가는 건 아니다. 지난 40년 부대끼며 우리와 함께했던 생활문화를 의·식·주를 중심으로 되짚어보고 바람직한 앞날의 삶을 그려본다.
등 따습고 배 부르자 인정은 떠나고…
“따르릉.” 전화를 받은 어머니가 불이 난 듯 내게 고함을 친다.“야야, 빨리 재복이네 불러 오너라.” 사랑방에 누워 있던 나는 후다닥 일어나 동네 골목을 쏜살같이 달려 재복이네 삽짝 문을 들어서며 “아제요, 재복이 전화 받으소.” 정작 전화를 받는 건 재복이 아버지뿐이지만 온 식구가 줄줄이 달려와 옆에서 귀를 곤두세운다. 6개월 전 입대한 재복이형이 연천인가 어디 첫 외출을 나와 전화를 한 것이다. 전화요금이 오를세라 얼른 전화를 끊은 재복이 아버지가 “재복이 고생 안 하고 잘 있다네”하는데도 재복이 어머니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훔친다.
40여 년 전 우리 동네에 전화기라곤 우리 집의 단 한 대뿐이었던 시절의 얘기다. 전화는 그렇다 치고 동구 밖 대장간 앞을 지나치다 대장장이 할배한테 끌려가 부산서 온 아들 편지를 읽어 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40여 년 전 우리 동네에 전화기라곤 우리 집의 단 한 대뿐이었던 시절의 얘기다. 전화는 그렇다 치고 동구 밖 대장간 앞을 지나치다 대장장이 할배한테 끌려가 부산서 온 아들 편지를 읽어 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안동 시내 변두리 운안동이란 조그만 농촌 집성촌이었다. 이리저리 핏줄이 걸리지 않는 집이 없어 만나는 어른들은 모두가 아제, 할배, 아지매, 할매였다. 아버지가 시내에서 목재소를 운영한 덕에 문명의 이기가 우리 동네에 첫선을 보이는 곳은 언제나 우리 집이었다.
어느 해 삼복에 냉장고가 우리 집 대청마루에 좌정하고 나서 동네 할머니들이 미숫가루에 얼음을 둥둥 띄운 사발을 받아들고 신기해하던 일이 엊그제 같다. 16인치 흑백 TV가 우리 집에 들어왔을 때 마루 끝에 TV를 앉히곤 멍석을 깔면 마당은 밤마다 만원이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고향 선배들이 환영회를 해 준다고 해서 나갔더니 소줏집을 시작으로 막걸리집, 생맥줏집을 거쳐 고주망태로 색줏집에 종착하게 되었다. 쓰레기와 생활하수가 범벅이 돼 질퍽거리는 신촌 학교 앞 창천동 개울가엔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무허가 니나노 판잣집이 즐비했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오색 한복 옷고름을 풀어헤친 작부들이 팔소매를 잡아끄는 대로 어두컴컴한 방에 들어갔다. 그날 밤 나는 결국 시계를 풀어야 했다. 이대 앞에 똬리를 튼 하숙집의 실세는 식모 누나였다. 향토장학금(?)이 올라오면 술집에 잡힌 시계나 영어사전은 찾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에게 영화 한 편을 보여주거나 ‘동동구리무’ 한 통쯤은 상납해야 했다. 상납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집에서 돈이 올라오면 하이에나 후각의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서린동 골목 낚지집에서 소주를 시작으로 열차집에서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신 뒤 종로 2가에서 철거덕 철거덕 전차를 타고 아현동에 내린다. 또다시 입가심을 한다며 빨간 고추등이 켜진 도라지 위스키 시음장에서 한잔씩 걸치고 통금에 걸릴세라 마지막 버스를 타고 하숙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가슴 뛰는 첫 여름방학-. 땟국물이 흐르는 겨울옷, 봄옷을 한보따리 챙겨들고 동향 친구들과 청량리역에 가면 좌석표는 아예 구할 생각도 말아야 했다. 오후 4시 차를 타면 벌써 입석이 비좁도록 중앙선 열차는 만원이었다. 까짓거, 거꾸로 매달려 가면 어떤가. 꿰~엑 기적을 울리고 부산진행 열차는 서서히 움직였다. 열차칸 천장엔 탈탈거리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아래 위로 올리고 내리는 차창은 모두 열어 놓았지만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석탄을 삽으로 화덕에 처넣어 증기터빈으로 달리는 열차는 칙칙폭폭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답답하게 달려갔다. 강원도를 지나며 수많은 터널을 만나면 매캐한 냄새와 함께 콧구멍 주위는 시커멓게 되고야 만다. 통로에 주저앉아 졸거니 깨거니 하다가 안동역에 내리면 새벽 3시. 연착으로 장장 11시간 만에 만나는 고향이지만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 개찰구를 빠져 나갈 땐 역전 파출소 경찰이 고무도장을 팔뚝에 찍어 주었다. 통행금지 면제 증명이었다. 보따리를 들고 밤길을 걸어 역에서 10여 리나 떨어진 집으로 가면 12시쯤 온다던 둘째아들을 기다리며 어머니는 대문 앞에 서 계셨다. 우물가에서 어머니가 끼얹어 주는 등목을 하고 마루에 앉으면 객지에서 배가 곯았을세라 어머니는 닭백숙 상을 들고 와 옆에 앉아 부채질을 해 주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우리 동네에 하나뿐이었던 전화기 얘기는 전설처럼 되었다. 이제는 시골 초등학생도 그놈의 모바일폰인가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고 지하철 노숙자에게도 휴대전화는 필수품이 되었다. 휴대전화 덕분에 편지도 없어졌다. 우편집배원이 전해주는 거의 모든 것은 편지가 아니라 카드요금 청구서다. 이제, TV는 집집마다 있는 게 아니라 방방마다 있고 냉장고가 문제가 아니라 김치냉장고·냉동고 없는 집도 없다. 판자 작부집이 늘어섰던 창천동 오물 개천은 복개돼 백화점이 하늘을 찌른다. 연탄을 때던 한옥집 하숙방은 그림 같은 건물이 솟아올라 중앙 냉난방 원룸이 되었다. 종로통을 오가던 전차는 사라지고 지하철이 땅속을 질주한다. 서울서 안동까지 11시간이나 걸리던 길이 사통팔달 고속도로를 타면 3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편리한 쪽으로 변했다.
지난 40년, 기술문명은 눈이 핑핑 돌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했다.우리의 육체는 그만큼 편해졌다. 그러나, 그러나…가슴 속은 왜 이리 휑하니 뚫려 삭막한 바람만 오가는가. 문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문명은 그리운 것을 깡그리 없애버렸다. 문명은 불편한 걸 쓸어가며 따뜻했던 우리의 마음도 빼앗아 갔다. 그 시절이 그립다. 휴대전화가 없어도, 지하철이 없어도, 그 시절로 돌아가서 살고 싶다.
조주청 (여행칼럼니스트)
출처: 중앙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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