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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독도,독도,독도 이야기

by 까망잉크 2008. 7. 18.
LONG
홍순칠에 관한 짧은 이야기 하나

6ㆍ25 전쟁의 혼란 속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독도 의용 수비대를 조직해서 독도를 잘 지켜 낸 홍순칠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당시 치안 본부 소속 조동규 시험관이 찾아왔다.
“대통령께서 국가 혼란 중에 독도를 잘 지켜 낸 홍순칠 대장의 소원이 뭔지 알아보고 가능하면 원하는 대로 해 주라고 지시했소. 그러니 나에게 소원이 뭔지 말해 주시오.”
그러자 홍순칠은 대답했다.
“울릉도에는 놀고 있는 청년들이 많은데, 그들을 경찰관을 시킨다면 독도를 더 잘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청년들의 명단을 원고지에 적어 주었다. 개인의 소원은 말하지 않고 울릉도와 독도만을 생각한 것이다. 그 뒤 홍순칠의 추천을 받아 손대익, 송한구, 정영호 등 약 30명의 청년들이 한꺼번에 경찰에 특별 채용되었다.
홍순칠은 독도만 지켜 낸 것만 아니라 울릉도 주민으로서 개인적인 욕심 없이 울릉도를 위해서 일생을 바쳤으며, 독도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도 더욱 굳건하게 만든 울릉도와 독도의 영웅이었다.

 

독도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연 보호 구역이다.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독도일원으로, 독도는 동도ㆍ서도의 두 섬과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약 30개의 바위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도는 철새들이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동해안 지역에서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의 대집단이 번식하는 유일한 지역이므로 1982년 11월 4일 ‘독도 해조류 번식지’로 지정하여 보호해 왔다. 그러나 독도에 독특한 식물들이 자라고, 화산 폭발에 의해 만들어져 지질적 가치 또한 크고, 섬 주변의 바다 생물들이 다른 지역과 달리 매우 특수하므로 1999년 12월 ‘독도 천연 보호 구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독도는 신라 지증왕(재위 500∼514) 이래로 내려온 우리 영토로서 역사성과 더불어 자연 과학적 학술 가치가 매우 큰 섬이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울릉도에 위치한 독도 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영토 박물관으로 1997년 문을 열었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영토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설립된 독도 박물관은 울릉군이 제공한 대지 위에 삼성 문화 재단이 세웠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연면적 484평의 공간에 1, 2층에 걸친 4개의 전시실과 자연 생태 영상실, 야외 독도 박물원이 갖추어져 있다.
독도 의용 수비대 대장이었던 고 홍순칠 대장의 유품과 독도 박물관 초대 관장이었던 이종학 관장이 30여 년 간 국내외에서 수집한 독도 관련 자료, 푸른 독도 가꾸기 모임의 자료 등을 한 곳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

 

독도는 동해의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라는 전략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한ㆍ일 양국 간에 영유권 분쟁이 발생하고 있어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지역이다.
일본은 1905년에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바꾸고 시마네현에 편입한 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독도를 둘러싼 한ㆍ일 간의 분쟁은 1952년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1965년 맺은 한ㆍ일 어업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고 우리 정부와 새로운 협상 끝에 1998년 11월 28일 신 한ㆍ일 어업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독도를 중간 수역 포함시켜 사실상 일본과의 공동 관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어업 협정일 뿐 영유권 협상이 아니지만, 일본인이 독도 근해에서 고기를 잡는다 하더라도 이를 막을 수 있는 명백한 근거가 사라지고 중요한 오징어 어장의 일부를 잃게 되는 등 우리 어민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어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그 후 일본에 우익화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일본 시마네현 의회는 우리 나라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5년 3월 16일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 로 정하는 조례안 가결을 강행하여 우리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우리 정부는 같은해 3월 17일 일반인에게 독도 방문을 전면 허용하고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제2의 한반도 침탈' 과 같으며 이에 강력 대응한다는 내용의 대일(對日) 신 독트린 발표하였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국제 사법 재판소의 판결을 통해 해결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국제적인 홍보와 로비 활동으로 세계의 유명 지도에는 독도가 일본해(Japan Sea)에 있는 다케시마[竹島] 혹은 분쟁 지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요즘 일본과 우리 나라 사이에 독도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하고, 우리 또한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독도는 양국의 국방과 영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일본에 대한 적대 감정 또한 높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독도는 분명 우리 나라의 영토이다. 이를 입증하는 문헌을 살펴보자.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의 '조선왕국전도', 일본의 옛 문헌과 지도 등에서는 독도를 한국의 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옛 문헌「은주시청합기」에서는 울릉도와 독도 옆에 '조선의 것'이라고 글자를 써 넣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17세기 말 일본 정부는 독도와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하였으며, 1696년 일본 정부는 본국 어부들이 울릉도 및 독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19세기 말 대한제국 정부는 갑오개혁 후 작성한 근대적 한국 지도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정확한 위치를 표시하고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또한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서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것을 세계에 공표하였다. 이후 서양 사람들은 독도를 '리앙쿠르 바위섬'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최근 일본이 마음대로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편입하여 '다케시마'라고 부르나, 우리는 우리의 독도를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다.

 

 

 

 

 

참고:대교학습 대백과.

ARTICLE

 

 

독도 (獨島)

 

   



 

 

독도와 독도 의용 수비대

(1) 독도
동해에 있는 화산섬으로, 동도(東島), 서도(西島) 및 33개의 주변 바위섬과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0.186㎢이다. 해수면 아래에 있는 부분이 매우 넓고 깊으며 해수면 위의 부분이 그에 비해 매우 좁다. 해안은 절벽을 이루며 독도 수비대가 살 수 있도록 터를 닦아 집을 지었고 배가 닿을 수 있는 시설도 만들었다.
조선 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 '삼봉도' 등으로 불렀다. 조선은 한때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모든 섬에 공도(空島) 정책을 폈다. 이런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서 일본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자주 하자,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명확히 하고 일본 어부의 고기잡이를 금지시켰다.
'독도'라는 이름은 1906년 울릉 군수 심흥택이 처음 사용하였으며 1914년 경상북도에 편입되었다. 또한 2000년 4월 7일을 기점으로 행정 구역상 주소를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산1~37번지로 정하였다.
일본은 우리 나라가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에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바꾸고 시마네현에 편입하였다. 그 뒤 계속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 우리 나라와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2) 독도 의용 수비대
1953년 4월 26일. 울릉도 도동 선창가에서 독도 의용 수비대 발대식이 있었다. 1956년 3월에 울릉군 경찰서 소속 독도 경비대로 독도 수비권을 이양할 때까지 민간 중심으로 구성된 수비대가 50여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독도를 방어한 것이다.
독도 의용 수비대가 독도를 수비하던 무렵은 일본의 독도 침범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여서 그들의 활약은 더욱 빛을 발했다. 일본 어민들은 1953년 5월 28일을 시작으로 그 해 6월 11일, 17일, 28일에 잇달아 독도 침범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일본 어민들의 독도 침범 배후에 일본 정부의 부추김이 있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부족한 물자와 자연 환경의 악조건 속에서도 독도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싸워 온 독도 의용 수비대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자신 있게 독도가 대한 민국의 영토임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독도를 끝까지 지킨 독도 의용 수비 대장 홍순칠

- 생존 연도 : 1929. 1. 23 ~ 1986. 2. 7
- 활동 분야 : 군사
- 주요 활동 : 독도 의용 수비 대장으로 독도를 끝까지 지킴.
- 주요 수상 : 근무공로훈장(1966년), 보국 훈장 삼일장(1996년)
  홍순칠은 어떤 생애를 살았을까?
<독도>
홍순칠은 1929년 1월 23일 울릉도에서 태어나 울릉도에서 자랐다.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에 들어가 많은 전투에 참전했으나 원산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1952년 7월 15일 상사로 군대를 제대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1952년 8월 20일, 재향 군인회 울릉군 연합 분회를 만들고 울릉 연합 분회장이 되었다.

일본인들이 제멋대로 쳐들어와 독도가 엉망이 되자, 1953년 4월 20일 자신과 뜻이 맞는 울릉도 주민 중 6ㆍ25 전쟁 참전 용사 출신 33명을 모아 독도 의용 수비대를 만들어 독도 지키는 일을 시작하였다.

1953년 6월 24일, 일본 수산 고등 학교 실습선이 허락도 없이 독도로 오자 돌려보냈고, 7월 12일에는 일본 해상 보안청 순시선이 무단으로 독도 근처에 오자 이를 물리쳤다. 또한 1953년 8월 5일에는 독도의 동도 암벽에 ‘한국령’이라고 쓴 대한민국 영토비를 세워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다. 1954년 8월 5일 일본 해상 보안청 순시선, 1955년 11월 21일 일본 해상 보안청 순시선 3척과 항공기 1대를 총격전을 통해 물리쳤다.

3년 8개월 동안 일본을 상대로 50여 차례의 목숨을 건 전투를 치르며 독도를 지킨 홍순칠은 1956년 12월 25일, 독도 의용 수비대 임무를 끝내고 경찰 경비대에게 독도를 지키는 임무를 넘겼다. 1957년 3월 1일 독도 의용 수비대 동지회 회장이 되었고, 1966년 4월 12일에는 국가로부터 5등 근무 공로 훈장을 받았다.

그 뒤로도 ‘푸른 독도 가꾸기 운동’을 벌이는 등 독도에 대해 열정을 쏟으며 독도 사랑을 실천하다가 1986년 2월 7일 서울 보훈 병원에서 평소 앓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용인의 천주교 공원 무덤에 묻혔으며, 죽은 지 10년이 지난 1996년 4월 6일, 국가를 잘 지킨 공로로 보국 훈장 삼일장이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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