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에서 "태어 낳는가"
조공견지묘(趙公狷之墓)
☞신라의 장군 김서현(金舒玄)은 경진일 밤에 길한 꿈을 꾸고 김유신(金庾信)을 낳았다. 그래서 그 날짜로 이름을 삼으려 하였는데, 예(禮)에 일월(日月)로 이름을 삼지 않는 법이 있었다. ‘지금 경(庚)과 유(庾)는 글자가 비슷하고 진(辰)과 신(信)은 소리가 비슷하다. 더구나 옛사람 가운데 유신(庾信)이라 이름하였던 자가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 여기고, 마침내 이름을 유신이라 하였다.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집안사람이 난초 꿈을 꾸는 징조를 보였다. 그래서 처음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가 후에 몽주(夢周)로 고친 것이다.
☞안렴사(按廉使) 조견(趙狷)은 본명이 윤(胤)으로, 평양 관찰사 조준(趙浚)의 아우이다. 왕조를 혁명하는 즈음에 그 형에게 울며 간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자 달아나 송산(松山)에 이르러 이름을 견(狷) 자로 고쳐 견(犬)이라는 부수를 쓰고 호를 송산(松山)이라 하였다. 대개 이름은 견마(犬馬)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뜻을 취하고, 호는 산이 움직이지 않고 소나무가 시들지 않는 뜻을 쓴 것이었다. 조준은 그 아우가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몰래 개국훈(開國勳)에 기록하여 억지로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하였다. 조견은 임종하면서 집안사람에게 훈계를 남겨 묘도(墓道)에 ‘고려(高麗) 안렴사(按廉使)’라고만 쓰고 신도(新都)의 관작을 쓰지 말라고 하였는데, 자손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훈적(勳籍)대로 썼다. 그러자 비갈(碑碣)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석 면의 관작을 쓴 부분에 내리쳐 ‘조공견지묘(趙公狷之墓)’ 다섯 글자만 남게 하였다.
☞충문공(忠文公) 성삼문(成三問)은 태어날 때에 공중에서 “태어났는가?”라고 세 번이나 물었다. 그래서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하였다.
☞문간공(文簡公) 유관(柳寬)은 처음 이름이 관(觀)이었는데 그 아들 계문(季聞)이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 임명되자 관직명이 아버지의 이름을 범한다 하여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에 그 아비의 이름 가운데 관(觀) 자를 관(寬) 자로 고치도록 명하면서 하교하기를, “아비의 이름을 이미 고쳤으니 재촉하여 빨리 부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조에 원황(元滉)은 연조도감(延詔都監)의 낭청(郞廳)에 차임되었는데 조사(詔使)가 관상을 잘 본다는 소문을 듣고 그 아들 넷을 그에게 보였다. 조사가 네 아들의 이름을 묻고 판단하여 말하기를, ‘장자 효연(孝然)은 연(然) 자에 다시 바로잡고 재차 시작하는 뜻이 있으니 후에 반드시 중도에는 미미했다가 다시 번창할 것이다. 그리고 둘째 아들 효이(孝而)는 이(而) 자에 계속하여 면면히 이어지는 뜻이 있으니 후에 반드시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 셋째 아들 효의(孝矣)는 의(矣) 자에 마무리지어 매듭하는 뜻이 있으니 후에 반드시 전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넷째 아들 효재(孝哉)는 재(哉) 자에 미결(未決)의 뜻이 있어 여전히 여운이 남으니 후에 반드시 떨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 것이다.’ 하였는데 모두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8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이름을 휘(諱)하다에서
[출처] 공중에서 “태어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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