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栗谷)이라는 호(號)가 생긴 사연~
율곡이 다섯 살 무렵,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강릉에서 성장하고 있던 율곡에게 어느 날 스님 한 사람이 찾아온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탁발을 하고 있던 스님에게 외할머니 이씨는 얼른 광으로 가서 쌀 한 되를 퍼서 스님에게 시주하였다고 한다.
“복 받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이 합장하고 인사를 할 때 현룡이 할머니를 부르며 뛰어왔다. 현룡은 율곡의 아명. 뒤로 돌아서려던 스님은 그 소리를 듣고
현룡을 쳐다 보았다. 한참을 쳐다 보던 스님은 할머니에게 말하였다.
“참 총명해 보이는 아이로군요.”
스님의 말에 외할머니는 기분이 좋아서 웃으며 대답하였다.
“네 아주 똑똑한 아이랍니다.”
그러나 스님은 잠시 머뭇거리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우리 나라를 위해서는 꼭 살아 있어야 하는데, 쯧쯧.”
혀를 차는 스님의 말에 외할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러자 스님은 다시 합장을 하며 말하였다.
“저 아이는 분명 영특한 아이지만 하늘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스님은 말을 마치고 벼랑을 꾸며 훌쩍 길을 나섰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이 너무 궁금하였던 외할머니는 스님을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곧 스님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스님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마을 동구 밖에서 간신히 스님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외할머니는 스님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스님, 저희 집으로 가셔서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선선히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두 사람은 오죽헌으로 돌아왔으나 스님은 한참 동안을 마당에서 놀고 있는 현룡을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말씀하여 주십시오, 스님. 저 아이를 하늘이 가만히 놓아둘까 그것이 걱정되다니요.”
외할머니가 채근하자 스님이 무거운 입을 떼었다.
“저 아이가 지나치게 똑똑하여 하늘의 천기를 해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액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마침 소문을 전해들은 현룡의 아버지 이원수도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저 아이를 위해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합니다.”
밤나무 천 그루라는 말에 기가 막힌 외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밤나무 천 그루를 한꺼번에 어떻게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저 아이의 아버지가 혼자서 심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 혼자서 밤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스님의 말에 이원수가 따지듯 물어 말하였다.
“아니, 무슨 이유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 아이의 재능을 탐낸 하늘이 호랑이를 보내어 잡아갈 것입니다.”
“하필이면 밤나무여야 하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옛날 원효(元曉)대사께오서는 압량(押梁:지금의 경산군)의 남부 불지촌(佛地村)의 북쪽에 있는 율곡(栗谷)의 사라수(娑羅樹)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대사의 어머니께서 원효를 잉태, 만삭이 되어 마침내 그 율곡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내다가
홀로 해산을 하셨습니다. 창황 중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해서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두고 그 아래서 해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불렀습니다. 사라수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을 때 부처님을 편안하게 모셨던 상서로운 나무로
이 아이를 보호해주기 위해서는 원효대사의 가피(加被)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침내 할 말을 마친 스님이 합장을 하고 사라지자 외할머니는 사위에게 말하였다.
“여보게, 어서 저 스님이 시키는 대로 하게나. 저 스님은 보통 분이 아닌 것 같으네.”
장모의 말을 듣고 이원수는 하인을 불러 모아 밤나무 묘목 천 그루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하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나 밤나무 천 그루를 일시에 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었다.
간신히 구한 것은 밤나무 오 백 그루. 나머지는 할 수 없이 밤톨로 심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원수는 오 백 그루의 묘목과 오백 개의 밤톨을 가지고 하인들과 함께 파주의 노추산으로 갔다.
스님의 말은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아버지 혼자서 이 모든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이원수는 혼자서 땅을 파고,
혼자서 밤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이원수는 꼬박 사흘 낮 사흘 밤을 쉬지 않고 오백그루의 밤나무와 오백 개의 밤톨을 혼자서 심었다고 한다.
이원수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졌으나 노추산은 이로부터 원효가 태어난 밤나무계곡, 즉 ‘율곡(栗谷)’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다시 강릉의 오죽헌 집에 탁발승 하나가 찾아 들었다. 외할머니는 정성껏 담은 쌀 한 되를 가져다 바랑에 넣어다 주는 순간
그 스님이 1년 전에 찾아왔던 바로 그 스님이란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스님께서는 작년에 오셨던 그 스님이 아니신가요.”
“그래, 밤나무는 모두 심으셨는가요.”
“스님의 말씀대로 더도 덜도 아닌 꼭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었습니다. 지금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럼 이 아이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밤나무를 심은 파주의 노추산에 있을 것입니다.”
스님은 그 즉시 파주의 노추산을 찾아간다. 노추산에서는 이원수가 땀을 흘리며 밤나무를 가꾸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이원수가 스님을 쳐다본 순간 스님은 다짜고짜로 밤나무의 숫자를 세어보기 시작하였다.
“한 그루, 두 그루,….”
스님은 지팡이로 밤나무를 일일이 확인해 나가면서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998,999,….”
하나하나 밤나무의 숫자를 헤아리던 스님의 지팡이는 마침내 땅위에서 멎어섰다.
“한 그루가 모자라는군요.”
한 그루가 모자란다는 말에 이원수는 깜짝 놀라며 다시 세어보았다. 그러나 과연 스님의 말대로 꼭 한 그루가 모자랐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히 오백그루의 밤나무 묘목과 오백 개의 밤톨을 심었는데, 한 그루가 부족하다니.
그러자 스님이 웃음을 지으면서 말하였다.
“이제 당신의 아이는 하늘의 것이요. 곧 하늘이 당신의 아이를 데리고 갈 것이요.”
그 때였다. 낙심하던 이원수는 땅에 떨어진 낙엽을 헤치다 이제 막 땅을 뚫고 솟아 나오는 새싹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여기도 있습니다.”
이원수는 소리쳐 말하였다.
“분명히 밤나무 새싹입니다.”
스님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하였다.
“내가 졌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순간 스님은 호랑이로 변하여 울부짖으며 하늘을 박차고 사라졌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로부터 파주의 노추산은 밤나무가 많은 율곡리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한갓 야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율곡의 호는 이러한 야담의 본거지인 ‘율곡리’에서 따온 것이었으며,
실제로 원효가 태어난 곳이 율곡의 ‘사라수’ 아래였다고 삼국유사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율곡이란 이름도 이처럼 원효와 깊은 인연을 가진 불교적 숙연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옮긴글>
[출처] 율곡(栗谷)이라는 호(號)가 생긴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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